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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세계유산등재와 새로운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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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다닐 때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들어왔던 친구가 있었다. 1980년대만 해도 드문 일이었는데, 외국생활을 오래 했던 그 친구는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수업시간을 유쾌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가지 일화가 있지만,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일이 있다.

어느 날 그가 느닷없이 속내를 털어놨다. "한국 사람들은 툭하면 뚜렷한 사계절과 푸른 하늘을 자랑하는데, 그게 무슨 자랑거리야? 그렇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다고?" 그때까지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왔던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별 것 아니라니,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외국문학과 예술을 전공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타자의 시선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나는 궁색한 변명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 일은 한국문화의 고유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뚜렷한 사계절과 푸른 하늘'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자랑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서야 한반도가 얼마나 살기 좋은 땅인지 알게 됐고, 미세먼지로 뒤덮인 하늘과 지구 온난화로 잃어버린 사계절을 경험하고서야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지 깨닫게 됐다. 이제 우리는 아무도 뚜렷한 사계절과 푸른 하늘을 말하지 않는다.

얼마 전 학위논문을 준비하며 나를 찾아온 몇 명의 대학원생이 있었다. 한류 덕분에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원형이 존재하고 그것은 다른 문화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했다. 아직까지 한국의 미를 비애미라는 어떤 단일한 특징으로 환원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망령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문화인식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맑은 하늘이 한국에만 있냐는 친구의 지적처럼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를 비롯해 유교, 도교, 심지어 샤먼조차 한반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문화라는 것이 본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것인데, 우리 고유의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한국의 역사, 문화, 자연환경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하게 만든 이유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특별한 것이 아니어도 훌륭한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연환경 하나도 엄청난 국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특히 전통을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존재했던 문화의 흔적으로 보는 태도는 우리 문화전통을 매우 좁게 해석하게 하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6월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산사 7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다른 유산과 달리, 한국의 산사는 사라진 문명의 흔적이 아니라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문명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등재신청서 제출 직전, 문화재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최초에 제출된 '한국의 전통산사'를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변경했는데, 그것이 이번 등재 결정에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6~7세기에 창건된 이래, 거듭되는 전란의 피해에도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면서도 불교수행과 문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 천년의 역사를 단절 없이 이어온 역사성과 그 인문적 가치가 인류가 보존하고 선양해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서 인정받은 것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중대하고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유형의 유산을 보존만 아니라 살아있는 전통으로서의 한국불교의 수행문화와 신앙의 진정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그것은 우리에게 문화에 대한 확장된 이해와 새로운 문화적 역량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명법스님 구미 화엄탑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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