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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목길]“한국인이 이방인” 동대문 ‘실크로드’ - 광희동 중앙아시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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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하나 돌아 들어섰을 뿐인데 전혀 낯선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 있습니다.
서울 속 ‘작은 러시아’로 불리는 중구 광희동 중앙아시아거리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곳은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에서 온 상인들과 여행객이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사랑방이자 집결지입니다.
거리 곳곳엔 멀리서 온 이들이 여독을 편히 풀 수 있는 숙소가 즐비한데다,
모퉁이만 돌면 이역만리 고향으로 물건을 보낼 수 있는 택배업소도 있고,
고향음식을 파는 식당까지 골목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으니 중앙아시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따금 이국적 정취를 느끼려고 이곳을 찾는 한국인이 도리어 이방인이 되곤 하죠.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이곳이 이처럼 이국적인 골목이 된 것은 러시아 보따리상들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 1990년을 전후해 이 일대는 하루에만 수백 명의 러시아 보따리상들이 머물다 가는 서울의 대표적 쉼터가 됐습니다. 지리적으로 동대문시장과 가깝고, 지하철이며 버스가 사통팔달로 잘 뚫려 있으니 하룻밤 쉴 곳으로 제격이었던 거죠. 동대문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러시아 보따리상을 위한 식당과 무역회사, 탁송업체들이 연이어 문을 열면서 같은 언어권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내 자연스럽게 중앙아시아 거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보따리상이 모여들기 전 광희동은 유흥의 천국이었다고 합니다. 1980년대, 낮에는 자동차 인테리어, 배터리 점포를 찾는 상인과 손님이, 밤에는 인근 동대문의 고고클럽과 카바레에서 넘어온 행인들이 골목의 주인노릇을 했는데, 이 흐름을 타고 넘어온 주점과 클럽, 여관과 호텔이 우후죽순 생겨나 유흥가를 이뤘습니다.


한데 유흥가로서 광희동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만큼 제법 유구합니다. 조선시대 광희동 인근은 흥인지문과 광희문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에 따라 보행객주(步行客主)집과 주막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지척에 동대문시장의 시원이 되는 이현(梨峴, 배오개) 시장이 있었고, 훈련원을 비롯한 군영 또한 인근에 있어 하급 군인들이 일과를 마치고 이곳 주막에 들러 한 잔 술에 하루의 시름을 내려놓곤 했다지요. 시장과 사람이 있으니 자연히 깍정이패(거지) 또한 모여들었습니다. 이 풍경을 소설가 김주영 선생은 ‘객주’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남소문동을 꿰뚫어 하도감 곁을 지나 훈련원 뒤쪽으로 흘러내려 개천에 합치면서 오간수 해자로 흘러드는 곳이었다. 그곳에 60여 명의 깍정이 딴꾼들이 움막을 짓고 모여 살았다.”
외환 위기 당시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던 광희동 골목은 낮은 환율을 기회 삼아 몰려든 러시아 보따리상과 이들을 상대할 인력이 집중됨에 따라 러시아어에 능통한 우즈베키스탄과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일터가 됐습니다. 호황도 잠시, 1998년 러시아가 국가부도사태(지급유예, 모라토리엄)를 맞으며 보따리상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이후 이곳에 정착한 중앙아시아 노동자들만 남게 됐고, 밤거리를 수놓던 러시아 상점들은 속속 우즈베키스탄과 몽골 상점으로 변모해온 것이죠.


이 일대에서 이른바 ‘몽골타운’으로 불리는 10층 빌딩 ‘금호타워’는 이국적 풍광의 정점입니다. 빌딩의 안내표지판이 모두 몽골인의 상점을 표기한 키릴문자로 빼곡하기 때문이죠. 타운 입구에서 만난 청년 체덴발(21)은 “오랫동안 못 본 삼촌도 만나고 여행도 할 겸 한국을 찾았다”며 “이곳 타운은 울란바토르 시내만큼이나 몽골인이 많아 반가웠다”며 활짝 웃어보였습니다. 건물 3층의 식당 ‘잘루스’는 한국에 온 몽골인들에겐 대사관 못지않은 사랑방입니다. 반가운 친구, 지인을 만난 이들은 이곳에서 몽골 전통 수태차를 마시며 다양한 소식과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러고 보니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식욕을 자극하는 빵 냄새가 난다 했더니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 ‘삼사’를 굽는 내음이었습니다. 냄새를 따라 찾아간 우즈베키스탄 식당 ‘사마리칸트’는 이 골목 곳곳에 분점(?)을 내며 동네의 명물이 됐습니다. 광희동 골목의 터줏대감인 셈이죠. 스타 사마리칸트의 사장 아모노브 샤리요콘(49)은 유창한 한국말로 “2003년에 동생 연락을 받고 와 오늘에 이르렀다”며 멋쩍게 골목의 가게를 소개했습니다. 이 골목 초입부터 끝까지 총 4개인 ‘사마리칸트’는 모두 아모노브 형제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보따리상이 모두 사라진 골목 여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지인에게 건물을 인수받아 16년째 이곳을 지킨 정온여관 사장은 “지금 우리집은 다 달방”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일대의 무역회사와 공장에 취업한 몽골,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들이 집을 구하기 전 몇 달씩 머물고 간다면서요. 높은 한국 물가에 선뜻 거액의 보증금 마련하기 어려우니 달방에 들어와 몇 달만 있어야지 하다가 1년 넘게 머무는 손님도 있다고 귀띔합니다.

맞은편의 구미장엔 입구부터 물건 사입(仕入) 박스가 빽빽이 늘어서있고, 입구에서 몽골 아주머니가 연신 날짜를 이야기 하며 통화를 계속합니다. 이곳 사장 역시 “이전 사장님 땐 러시아 손님이 많았다는데, 5~6년 전쯤부터는 몽골 손님이 많이 찾는다”며 “자동차 부품, 컴퓨터 의자부터 화장품까지 사입하는 품목도 가지각색”이라고 소개합니다.


골목 자체가 이렇다 보니 이 골목의 은행이나 파출소 분위기도 사뭇 다릅니다. 골목 초입에 있는 은행은 주말에도 몽골인만을 위한 특별 영업을 하고, 광희동 파출소엔 러시아어와 몽골어가 가능한 경찰관이 배치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이제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이 지역의 어엿한 구성원이 됐다는 얘기겠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골목을 바라보는 토박이 할머니의 표정은 처연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사마리칸트 본점 맞은편 집에 사는 김모(74) 할머니는 4세 때 함경도서 내려와 신혼 때 2년 분가한 기간을 빼곤 줄곧 광희동에 터를 잡고 산 본토박이랍니다.

“옛날 나 살던 집 바로 옆집이 김희갑(영화배우·희극인)씨가 살았었어. 지금은 외국사람들에 순 먹자골목 뿐 이지만 그전서 부텀 손끝이 매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고” 김 할머니의 회상에 따르면 수구문안이라 불린 이 골목 일대엔 매듭장인, 일명 ‘매디쟁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를 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이 골목에 나랑 이 집만 남았어. 오래 살아도 별 볼일 없지. 옆집 이웃도 가게로 팔고 나갔지 않아? 나한테도 몇백만원 월세 낼 테니 세 달라고 오늘도 전화가 와. 근데 돈도 돈이지만 내 삶이 묻은 집인데 어떻게 내줘.” 할머니의 눈이 아련합니다.

그렇게 정주(定住)와 유목(遊牧)이 혼재하는 이 골목에서는 서울 사람과 중앙아시아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터주대감이고 누가 이방인인지 모르게 말이죠.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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