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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여우비/이병국

최종수정 2018.06.14 10:11 기사입력 2018.06.1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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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여우비/이병국
젖지 않았다

여섯 번째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너를 기다리며
빈손을 가만히 쓸어 본다

주름의 굴곡을 비끄러매고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온종일 내렸다는 것을
조용한 절망을 입고 말라죽은 지렁이처럼
삶의 방향이 조금씩 기울던 십이월의 어느 날
덧붙인 얼룩을 잔뜩 뒤집어쓴 채

이를테면,

여섯 번째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젖었다는 것이다


■여우비는 문득 온다. 볕이 좋은 날, 내리는 듯 내리지 않는 듯 문득 와서 잠시 곁에 머물다 또한 문득 사라진다. 소나기라면 피했을 것이다. 며칠 동안 밤낮을 잇대어 내리는 큰비라면 단단히 채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우비는 햇살 사이로 자신을 숨기고 내린다. 그래서 오히려 도무지 젖지 않을 수가 없다. 기억처럼, 후회처럼, 회한처럼, 지나간 그 모든 것들처럼. 이미 지나갔기에 더는 지금-이곳에 없지만 그 때문에 더욱 확고하게 현전하는 어제들처럼. 마치 단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었으나 "아파 오기 시작"한 "여섯 번째 손가락"의 그 선명한 통증처럼.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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