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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라이브리뷰]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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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 객원기자

한정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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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부터 통독까지, 서독의 주(州) 사이에는 오케스트라 경쟁이 치열했고 격전장은 방송교향악단이었다. 수많은 지휘계 명장들과 유망주가 이곳에서 일했고 20세기 중후반에 쓰인 현대 작품은 지역 방송국이 신곡을 위촉하고, 방송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가령, 1985년 9월 윤이상 교향곡 3번은 정명훈 지휘,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이 초연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독일이 16개주로 정리되면서, 방송 교향악단 역시 여러 군데 합병이 이뤄졌고 근 20년 가까운 침체를 겪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2018년, 지금까지 살아남은 방송 교향악단의 생명력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유로존 위기 이후 독일은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했고, 방송 교향악단들 역시 예전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얀손스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인발의 말러로 친숙한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현 hr 심포니), 귄터 반트로 기억되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현 함부르크 엘브 필하모닉), 사라스테의 쾰른 방송교향악단은 2010년대 내한 공연으로 한국팬과 더욱 가까워졌다. 6월 2일 예술의전당에서 네 번째 내한공연(2012·14·16)을 갖는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DRP)도 마찬가지다.

DRP는 여러 번의 방한으로 국내 평론가 계층에는 이미 검증을 마친 전형적인 강소 교향악단이다. 세계 악단 가운데 이렇게 긴 명칭을 가진 악단이 또 있을까 싶다. 독어 원문(Deutsche Radio Philharmonie Saarbruecken Kaiserslautern) 표기에서 알 수 있듯, DRP는 방송국간 경영 합리화의 일환으로 2007년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RSS)과 카이저슬라우테른 SWR 방송 오케스트라(SWR RK)가 합병하여 새로 출범한 악단이다.

인구 18만의 자르브뤼켄은 20세기 중반까지 자르 공업지대의 중심이었다. RSS는 1984~1990년, 정명훈이 음악감독을 맡아 우리와 인연이 남다른 곳이다. 1989년 개관한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로 가기 전까지 정명훈은 독일 관현악의 기초를 이곳에서 함양했다. 인구 10만의 카이저슬라우테른은 1990년대 유럽 정상에 오른 축구클럽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나토(NATO) 주둔 기지로 유명하다. 남서독일 방송협회(SWR) 소속으로 라인란트·팔츠주의 RK가 기차로 40분 거리인 자를란트주의 RSS와 합병하는 그림은 선거구의 게리멘더링처럼 처음엔 기형적으로 보였다.
합병 후, 어수선한 DRP를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초대감독 크리스토프 포펜이었다. 지난 세기, 바이올린의 명수인 오스카 셤스키, 나탄 밀스타인을 사사한 포펜은 능란한 테크닉과 인자한 성품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케루비니 4중주단 리더와 뮌헨 체임버 감독을 맡아 단체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뮌헨음대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 교수를 지내면서 클라라 주미 강과 노부스 쿼르텟을 지도했고 6.25 60주년 월드오케스트라를 조직한 지한파 음악인이다.

RSS 감독을 맡은 지 1년 만인 2007년, 통합 DRP를 책임진 포펜 앞의 난관은 단원 감축이었다. 그러나 포펜은 그 어떤 단원에게도 나가라고 종용하지 않았다. 대신 “함께 음악을 만들자”고 했고, RK 출신 단원과도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나 흉금을 털고 대화했다. 악단의 어려운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시즌 동안 절대 ‘해고’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는 지휘자를 지켜본 단원들이 자진해서 거취를 정했다.

그렇게 시작된 신뢰를 기반으로 2007/08 시즌 후반부터 DRP의 케미스트리가 터졌다. 1994년부터 RSS 객원지휘자를 지내며 브루크너, 베토벤 전집(아르테노바)을 낸 스크로바체프스키와 일본 투어를 떠나며 대외 인지도를 높였다. 포펜과는 멘델스존·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욈스)을 녹음하고 포펜의 부인인 명 소프라노 율리아네 반제, 첼리스트 요하네스 모저 레코딩(핸슬러)하면서 부쩍 견고해진 조직력을 음반으로 알렸다.

2000년대 DRP를 대표하는 장기는 스크로바체프스키와의 독일 관현악이다. 거장 시대가 종언을 고한 2000년대 중후반, DRP와 스크로바체프스키의 조합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회고적이면서 고답적인 콤비였다. 이들은 독일 관현악에서 빛이 하나로 모아지듯 음형들이 질서를 찾는 모습을 보이며 마치 카를 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시절에 머무는 향수를 되살렸다.

2010년대 DRP를 책임진 감독은 카를 마렉 시숑이다. 세계 탑클래스 메조 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의 부군인 시숑은 한국에 짙은 애정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전 영국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처럼 낮으면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동시에 압도했다. 감독 임기를 연장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을 ‘2012·2014년 한국 투어’로 밝혔다. 독일내 방송교향악단과 경쟁하는 틈바구니에서 수위로 올라가는 지렛대로 한국 투어를 삼았다.

2017년 DRP가 영입한 뉴 페이스는 1980년 핀란드 태생의 지휘자 피에타리 잉키넨이다. 일찍부터 KBS 교향악단 객원 지휘를 비롯해, 2008년 뉴질랜드 심포니 음악감독, 2016년 재팬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로 동북아와 오세아니아에 서서히 입지를 다진 신예다.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 교향곡에 일가견이 있고, 바이올린 주자 출신으로 현악 파트에 활을 쓰는 방법을 달리하면서 홀 공명과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방법론을 갖고 있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바딤 레핀 협연)과 브람스 교향곡 4번에서 개성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울림이 기대된다.

DRP는 인터내셔널한 울림을 가진 오케스트라는 아니다. 좋은 의미로 ‘작은 도시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로컬의 느낌이 짙다. 가혹하리만치 반복 연습을 강요하던 스크로바체프스키에게 복종하는 모습에선 도제의 흔적도 보였다. DRP의 최고의 미덕은 단원 개개인의 여유와 정취가 요즘 시대의 사람답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 투어 때면 갈비집, 떡볶이 집을 기웃거리며 ‘진짜 한국’을 느꼈다. 급한 스케줄로 공항과 공연장만을 오가며 현지를 못 느끼는 악단들에선 볼 수 없는 푸근한 정취가 있다. 다음 투어의 재초청을 위해 예술의전당에서 전력으로 연주하겠다는 DRP의 의지는 우리 악단도 배워야 한다.

한정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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