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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기우는 동그라미/차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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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연결하면
새로운 별자리 하나 생겨날 것도 같고
한 가문을 지켜 주는 부적도 그려지겠다.
동그라미마다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싹을 내어주고 텅 빈,
씨앗 껍데기 같은 둥근 선을 들여다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 굽혀 머릴 맞대고 앉았다.
모성 쪽으로 기운다는 동그라미를 바라보자니
할머니의 기일을 묻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재가를 구하고 있다.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다.
어머니에게 가부장권을 넘겨준 음력이
양력을 앞세우고 뒤따라가고 있다.
동그라미 속 날짜를 읽는
어머니의 눈까풀도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내게는 그저 숫자로만 보이는 날짜인데, 어머니는
한쪽으로 닳는 인감도장 테두리 속 이름으로
정화수 그릇 속 얼굴로 읽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 흉내를 내며
새끼들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 둔 적 있지만
그저 사야 할 양초 개수만 보일 뿐이어서
촛불 밝기를 믿는 나는 양력으로 앞서 나가고
사연을 짐 진 어머니는 그믐처럼 뒤따라오고 있다.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머니 안짱다리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오후 한 詩] 기우는 동그라미/차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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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특별한 존재다. 그 명칭은 단지 한번 부르는 일만으로도 누군가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할 만큼 가공할 감염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러한 정념의 환상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실제 여성들의 삶을 그것 그대로 호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효과인지도 모른다. 혹은 포기했거나 억압했거나 삭제했거나 말이다. 그래서 한국시에서 '어머니'라는 호칭은 차라리 여성들이 '비존재'였으며 '셈하여지지 않은 자'였음을 증명하는 복자(覆字)라고 말해야 정당할 것이다. 이 시는 "가부장권"과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라는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들을 가로질러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을 향하고 있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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