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묵은 이야기를 뜬금없이 떠올린 계기가 있다. 얼마 전 한 외국 영화의 대사를 오역했다 해서 벌어진 논란을 접하고서다. 솔직히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설사 봤다 해도 영어 대사를 듣고 이해할 실력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오역 논란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논할 실력도, 자격도 없다. 단지 외화 오역 문제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행태를 이야기하고 싶다. 글을 쓰며 확인해보니 14일 현재 '번역가 처벌 요구' '번역계 추방' '번역 참여 반대' 등 제목의 청원에 동참한 이들이 모두 합해 8000명을 훌쩍 넘었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영화 줄거리를 왜곡할 정도라니 문제는 문제인 모양이다. 제대로 된 영화 감상을 방해한 셈이니 짜증도 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이게 청와대에 호소할 정도의 국정 현안일까. 영화 번역이 잘못됐다면 영화를 수입, 배급한 회사에 항의할 일 아닌가. 특정 번역가에게 앞으로 일을 맡기지 말라든지 아니면 관람료 반환 운동을 벌인다든지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데 이를 청와대에 청원한다는 것은 일종의 '관존민비' 의식에 젖은 구태로 보인다. 시민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정부 개입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관의 우위' 또는 '관의 정당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21세기에, 시민이 주인 되는 민주국가에서는 딱한 모습 아닌가.
기실 그 영화의 관람객이 1000만명을 넘었다는데 그중 1만명도 채 안 된 이들이 청원에 동참했으니 어쩌면 이는 지극히 괜한 시비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엽지추(一葉知秋), 낙엽 하나에서 가을이 옴을 안다고 했다. 오역 논란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오른 것에서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도는 '관 우선' '관 만능'의 유령을 보는 것은 지나칠까. 국민청원 게시판을 보고 있자니 지극히 개인적인 한풀이 장소 또는 무소불위의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는 글도 눈에 띄는 걸 보면 영 기우는 아니지 싶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ㆍ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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