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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0]보통리 저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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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 왔습니다. 정남면 보통리(普通里). 과천에서 봉담, 다시 동탄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 인접한 마을이지요. 후배 시인이 둘째를 시집보낸다 해서, 축하해주러 왔습니다. 잔치는 신부의 집 근처 리조트 정원에서 열렸습니다. '날씨도 부조(扶助)'를 한다는 말은 이런 날을 위해 있나봅니다. 청명한 봄날입니다.

주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선남선녀의 결합을 이번 남북 정상의 만남에 빗대었습니다. 상투적 미사여구가 없어서 좋았습니다. 정상회담의 과정이 조목조목 새내기 부부를 위한 덕담과 가르침의 재료로 쓰이더군요. 남녀가 함께 그려가야 할 정신의 풍경들이 판문점의 역사적 장면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기념식수'가 무엇보다 큰 상징으로 읽혔습니다. 소나무는 삼천리를 대표하는 생명, '장삼이사(張三李四)'를 닮은 나무. '합토합수(合土合水)'의 행위가 말과 글을 대신했습니다. 백두와 한라가 몸을 섞고, 대동강과 한강이 마음을 합치는데 무슨 수식이 필요하겠습니까.

20년 전에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올라가던 길목에 심었다지요. 온몸으로 민생(民生)을 져나르던 짐승과 청산을 지켜온 나무의 합체입니다. 제게도 각별한 감회가 엉깁니다. '소는 죽어 소나무가 되어 운다'고 노래한 바 있는 까닭입니다. 소나무는 '소의 나무'라는 생각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땅의 가장 보편적인 동물과 식물이 '평화와 번영'의 이정표로, 숨 쉬는 장승이 되어 섰습니다. 튀고 도드라져본 적 없는 목숨, 수수하고 무던한 생명이 무사하고 무탈한 세월을 축수합니다. 자연의 법칙과 순리의 규범이 가장 윗길에 놓이는 삶을 기약합니다. 오늘 주례 선생이 부부의 길을 이르는 이치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람도 햇살도 이래저래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보통리 저수지 봄 물결이 까르르르 소리를 내며 웃고 있습니다. 못 한 바퀴를 돌고 싶어, 슬그머니 산책로 입구로 내려왔습니다. 물 위로 난 길을 걸었습니다. 늪지를 이룬 저수지 가장자리 식생(植生)들을 보호하려고 만든 다리일 테지요. 아무튼 걷는 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꽃가루가 하얗게 날려서 조금 성가시지만, 자연의 호흡을 누가 멈추겠습니까. 저수지 뚝 밑 논밭엔 본격적인 농사철을 준비하는 농부들 손놀림이 분주합니다. 물도 흙도 흥겨운 낯빛으로 제 역할을 생각합니다. 야트막한 산이 저수지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논물은 하늘과 구름을 담고 가볍게 찰랑댑니다.

김소월이 '개여울'에서 묘사한 물의 움직임이 꼭 저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이는 느낌. 보통리 저수지 수면에 북녘 물빛도 함께 포개집니다. '보통강(普通江)'입니다. 평양성 서쪽을 돌아나가는 강이지요. 그 물도 지금쯤, 저렇게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며 강마을의 버드나무를 흔들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보통문' 근처에는 데이트하는 젊은이도 많겠지요. 성문 안 어느 우물가에는 지금도, 김동환 시인의 시 '웃은 죄'에 나오는 처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그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난 모르오,/웃은 죄 밖에."

'보통리'라는 마을은 여기 말고도 여럿입니다. 경기도 여주, 강원도 원주, 세종시. 모두 같은 이름을 거느리고 있는 고장들입니다. 그곳들의 풍광도 이 동네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의 강이 흐르고, 보통의 꽃이 피고, 보통의 새들이 지저귀는 땅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살림살이들을 꾸려갈 테지요.

지난해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집을 잃어본 저는, '보통'처럼 시시해 보이는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 어휘인지를 압니다. 범상치 않은 일을 당한 사람에게 '별 일 없느냐'는 질문보다 곤혹스러운 인사는 없습니다. '별 일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사실대로 '별일이 있음'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까닭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는 가르침은 '참'입니다. '보통 날'의 마음입니다. 이 못가에 그런 마음의 흙집 한 채 짓고 싶습니다. 자꾸 한눈을 파는 마음을 보통리에 풀어놓고 키우고 싶습니다. 평양에 다녀온 가수 백지영의 노래 '보통'이 품은 정한(情恨)과 이루고 싶은 꿈들도 한자리에 둘러앉히고 손잡게 하렵니다.

"보통 남자를 만나/보통 사랑을 하고/보통 같은 집에서/보통 같은 아이와/보통만큼만 아프고/보통만큼만 기쁘고/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보통처럼만 나 살고 싶었는데…." 어법은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질기게 매달리는 '보통'의 삶을 향한 비원(悲願)에 귀 기울이고 싶을 따름입니다.

애끓는 목소리에서 '총 맞은 것처럼' 아픈 마음의 상처가 만져집니다. 보통의 날들이 약입니다. '평화와 번영'도 서로 껴안고 보듬는 '보통'의 차원일 때, 지속가능한 행복의 자산이 되지요. 오늘 결혼한 젊은이들의 앞날도 보통리의 나날이기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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