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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성선경 시집 '까마중이 머루 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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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시집을 사 읽는 독자는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독서'라면 대개는 소설이고 나머지는 교양 내지 실용서적일 것이다. 시집이 왜 안 팔리나? 주변에 물으면 대답이 늘 비슷하다. "시는 어려워서" 안 읽는다는 것이다. 어렵다고 하지만 더 솔직히 표현하면 분명히 우리말로 썼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리라. 도무지 알 수 없는 글을 예순 편 정도 모아 놓고 시집 맨 뒤에는 '해설'을 붙였는데 이 또한 알아먹기가 어렵다.

그러나 시란 늘상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니 상징이니 암시니 운율이니 하는 기술적 장치로 범벅이 되어야만 좋은 시는 아니다. 대중이 사랑하는 몇몇 시편은 너무나도 쉬워 이해조차 필요없을 정도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어려운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로 시작되는 윤동주의 '서시'가 어려운가? 아름다움은 결코 어려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외상술을 마시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나이/외상술을 마시다 진주난봉가를 부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늦둥이를 위해 뜰에다 벽오동을 심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책을 읽으며 밤을 새우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나이/책에 쓰여진 대로 마음먹고 뜻을 세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그런데/술을 마시고/외상술을 마시고/진주난봉가를 부르고/뜰에다, 뜰에다 벽오동을 심는 저 화상/넌 누구냐?"

성선경이 쓴 이 시를 읽고 시인이자 뛰어난 독자인 채상우는 이렇게 풀어 썼다.

"자꾸 이런 생각만 든다. 그게 무엇이든 뭘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닌가라고. 시인의 말처럼 호기롭게 외상술을 마시는 것도, 그러다 괜스레 기운이 뻗쳐 진주난봉가든 무슨 노래든 헐헐 부르는 것도 모두 객쩍은 일만 싶다. 그런데 정말이지 그러고 싶다. '외상술을 마시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 노래를 부르고 뜰에다 벽오동을 심으면서 껄껄 웃고 싶다. 다시 꿈을 꾸고 싶고 그 꿈에 취해 있는 힘 없는 힘 다 쓰고 그만 나동그라져 쿨쿨 자고 싶다."
성선경의 시도 채상우가 풀어쓴 글도 맺힌 곳 없다. 이 쉬운 글들은 우리 마음 속에 스며들어 애틋한 감정을 우러나게 만든다. 콘크리트를 다져 지은 집에 물기가 새어들고 벽을 물들이고 퍼릇퍼릇 거뭇거뭇 곰팡이를 피워낼 때 우리는 어느 곳에 금이 갔는지 찾지 못한다. 다만 고요한 가운데 마음 한곳이 출렁이며 창밖에 내리는 비가 단지 거리의 소음만은 아니며 내 마음 깊은 곳을 적시게 됨을 실감한다. 시란 그런 것이다.

성선경이 새로 낸 시집 '까마중이 머루 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에는 꽃들과 나무들이 지천이다. 어디를 펼치든 흐드러졌느니 동백, 매화, 복사꽃, 벚꽃, 금마타리, 노랑제비꽃, 두루미꽃, 금강애기나리, 장미, 봉선화, 사랑초, 달맞이꽃, 석류꽃, 하늘매발톱, 호랑가시발톱, 영산홍, 능소화, 호박꽃, 만데빌라, 작약, 모란, 함박꽃, 구절초, 억새, 까마중과 머루 알, 돌단풍, 조팝나무, 백당나무, 앵두나무, 벽오동….

채상우가 묻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시집은 이토록 처연한가." 그리고 대답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목숨을 건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워라. 사랑은 벌써 지나갔다. 너는 가고 나만 남았다. 꽃도 풍경 소리로 운다. 그러니 시인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잊지 않겠다는 생각을 잊으며 당신을 잊는 것뿐이다. 그것은 한 백 년쯤 밀물과 썰물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고 오만 평이나 되는 고독을 경작하는 일이다."

그의 말처럼 누군가는 시인이 제시하는 사랑의 양상이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든 그렇지 않았든 시집 전체를 구조화하고 통어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그러하다.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이 도저한 낭만적 사랑의 근원에 '어찌할 수 없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핵심은 사랑이나 이별이나 당신이나 칠월이 아니라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도 어쩔 수 없는 어떤 정념에 휩싸인 상태'다.

평론가 이성혁의 해설은 헤아려 읽어야 한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겪고 외로이 힘겨운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시인이 태연자약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계에 내장된 생명력에 대한 신뢰, 그리고 민화가 보여 주는 민중적 세계의 낙관에 대한 신뢰 때문이리라. 벽오동으로 상징되는 늦둥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 그렇게 시인은 이 시집을 새 생명을 낳는 대지의 흙 속에 벽오동을 심으며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끝맺는다"고 썼다.

문화부장 huhball@

까마중이 머루 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
성선경 지음/파란/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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