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미줄라(MISSOULA). 미국 북서부에 있는 몬태나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인구 7만명이 모여 산다. 학생 1만5000명, 교수진 800명을 거느린 몬태나대학교가 이 도시를 먹여 살린다. 하지만 2010~2012년 벌어진 성폭행 스캔들로 미줄라는 '강간 수도'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 존 크라카우어가 미줄라에 주목한 이유다.
실상은 다르다. 이 도시에서 풋볼선수라는 명예에 취해, 풋볼을 사랑하는 시민들 뒤에 숨어 저지르는 죄질이 나쁜 강간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한다. 크라카우어는 몬태나대학교에서 2010~2012년 발생한 일들로 초점을 좁혀 사건을 추적한다. 책을 읽다 보면 여러 번 답답한 상황에 직면한다.
왜 피해자들은 침묵하는가. 피해자를 감싸야 할 사법시스템은 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동질감을 느끼는가. 성폭행은 어떻게 합리화되는가.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앨리슨 휴거트(22)는 이러한 질문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그녀의 삶은 2010년 9월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3학년 1학기 개강을 앞두고 어머니 집에 머무르던 휴거트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낸 보 도널드슨이라는 이성 친구가 있다. 가족처럼 자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도널드슨의 집에서 열린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밤, 도널드슨은 소파에서 잠든 휴거트를 강간한다.
휴거트는 용기를 내 남자친구에게 성폭행당한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오히려 그녀에게 화를 낸다. "네가 난잡하게 놀아서 그래. 다른 놈들과 붙어먹은 걸 강간당했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어물쩍 넘기려는 속셈이겠지."
나는 이 말이야말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피해를 고발하려 할 때 주저하게 만드는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친구든, 가족이든, 경찰이든 피해자가 마치 성폭행을 당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상황을 방치했다거나 본인의 실수를 덮으려고 성폭행을 변명의 도구로 사용했다고 지적하는 순간, 그들은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윤간하는 셈이 된다. 말로.
무신경한 발언을 하기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베이커 형사는 몬태나대학교 미식축구팀인 그리즐리(그리즈) 선수 다섯 명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그중 한 명에게 강간을 당한 캘시 벨냅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형사들이 성폭행 피해를 신고한 여성들에게 종종 던지는 질문이다. 벨냅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네, 있어요'라고 대답했죠. 그때 보인 형사의 반응으로 미루어, 그 형사는 내가 남자친구 몰래 바람을 피운 걸 덮으려고 강간당했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전혀 그런 게 아닌데 말이에요."
성폭행은 피해자가 거짓 주장을 한다는 의심을 받는 유일한 범죄다. 책에 등장한 여성 피해자 다수가 신고 후 경찰에게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대다수 여론은 그리즐리 선수들에게는 그들과 자고 싶어 하는 여자가 줄을 섰으므로 강간을 할 이유가 없다고 섣불리 판단한다. 피해자는 관심을 받고 싶어 거짓말을 한 꼴이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강간범들은 피해자의 침묵을 이용해 책임에서 벗어난다. 자기 이야기를 밝히면서 그런 침묵을 깨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은 강간범에게 강한 일격을 날릴 수 있다."
그가 미줄라에 주목한 이유는 가까운 사람들이 어린 시절 또래 친구와 가족의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였고 그로 인해 서서히 삶이 망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성폭력에 무관심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몬태나대학교 강간 사건을 알게 됐고 성폭행 문제에 대한 지극히 평균적인 인식과 그에 따른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라고 판단해 고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얼마 전 현직 여검사들이 검찰에서 묵인한 성추행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한 여검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성추행 당한 사실을 털어놓았고 동료 여검사들이 잇따라 검찰 내부에 만연한 성추행 실태를 고발했다. 전면에 나선 피해자들은 때론 사법 시스템의 부조리, 불신을 경험한다. 법정에서 정의는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피해를 드러내 말함으로써 그들은 다른 피해자가 진실을 말하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한다.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응원은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윌이 과거 학대받았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딛고 변화할 수 있었던 힘은 숀의 말 한마디에 있었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경제부 기자 argus@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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