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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63년생 절망 퇴직 은행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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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유인호 기자] 새해 첫 출근을 한 지난 2일 오전 9시. A은행 김모 지점장(55)은 두꺼운 코트를 벗고 사무실 책상에 앉으며 PC를 켰다. 인트라넷에 접속하기 위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로그인한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아닐 거야, 설마 새해 첫 근무일에…." 슬픈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희망퇴직'이라는 네 글자가 그의 안경 렌즈에 커다랗게 꽂혔다. 지난해 1962년생 선배들이 대거 옷을 벗은 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지는 몰랐다. 입행한 지 27년, 정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보낸 직장을 떠나야 한다. 희망퇴직 신청을 클릭하자 오히려 담담해질 수 있었다. 다만 코끝이 시큰해진 게 영하의 추운 날씨 탓인지, 직장 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김 지점장은 1963년생이다. 한국 베이비붐세대(1955~1963년생)의 막내다. 그는 지방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83학번인 그는 군대를 마친 후 어렵지 않게 A은행에 합격했다. 그때가 1990년. 당시 한국 경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상승 곡선을 타고 있었다. 기업들과 금융권에 일자리가 넘쳐났다. 김 지점장의 입행 동기만 600명이 넘었다. 당시 15개 일반은행, 22개 투자금융, 6개 종합금융, 58개 상호금고 등 그해 입행한 사람 수만 해도 수천 명에 달했다.

"조기 퇴직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죠. 은행의 영광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그에게 1997년 말 외환위기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반은행 5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천 명의 은행원이 명예퇴직으로 거리로 내몰렸다.
하지만 김 지점장은 그때만 해도 퇴직이라는 단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아닥쳤다. 세계적 금융사인 미국 리먼브러더스도 파산했다.

전 금융권에 다시 명예퇴직 바람이 불었다. A은행도 예외일 순 없었다. 입행 18년 차인 김 지점장에게 올 것이 온 것이다. 다행히 그는 명퇴 대상자에서 벗어났고,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지점장 승진 이후 5년째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그는 정년인 60세까지 50%의 연봉만 받으며 은행에 남는 것보다 퇴직을 택했다.

베이비붐 막내 세대의 은퇴는 김 지점장의 사례에서 보듯 앞당겨지고 있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금융권에선 다른 업종보다 더 빠르다. KB국민은행에서는 올해 희망퇴직 대상인 1963~1965년생만 1700여명에 달한다. 신한은행은 5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 주 대상자는 1963년생 행원으로 400여명이다. 우리은행의 1963~1965년생 행원 수는 1100여명. 이미 지난해 7월 1011명이 떠났다. KEB하나은행은 지난해 12월29일 희망퇴직 접수를 마감했다. 1963년생만 신청이 가능했다. 그 결과 관리자급 139명, 책임자급 60명, 행원급 8명 등 총 207명이 신청했다. 농협은행도 지난해 11월 명예퇴직 접수에 들어가 534명이 신청했다. 상당수가 1963~1965년생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지금의 은행 구도가 아니었다. 33개의 은행이 있었고, 당시 각 은행이 200여명만 뽑았다고 하더라도 1963년생이 수천여 명에 달했다"며 "앞으로 2년 정도 1963~1965년생 행원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 그간 고민거리였던 인사 적체 현상이나 항아리형 인력 구조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대 초 8만명대였던 국내 은행의 총 임직원 수는 꾸준히 늘어 2008년 10만명을 처음 돌파했다. 이어 2014년 11만8703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은행 점포 수도 2001년 약 5000개에서 점점 늘어 2012년 7698개로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후 상황이 또 달라졌다. 더 이상 대규모 은행원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은행원을 통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이뤄지는 비대면거래는 전체 은행 거래의 90%에 육박하고 있다.

은행 지점이 통폐합되는 이유다. 실제 국내 은행 점포는 2013년부터 4년 연속으로 매년 평균 150여개씩(총 595개) 사라졌다. 은행들은 정기 희망퇴직을 단행, 매년 수천 명의 은행원이 짐을 쌌다. 실제 지난해 9월 말 기준 18개 국내 은행의 총 임직원 수는 11만882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3893명 감소했다. 같은 시기 은행 점포 수는 247곳이 줄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디지털 금융이 빠르게 진화되는 데다 새로운 금융상품이 쏟아질 때마다 과도한 실적 경쟁이 벌어져 업무 강도가 높고 삶의 질은 낮아 스스로 은행을 떠나는 직원들이 늘고 있다"며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직원들이 희망퇴직 후 안정적으로 제2의 인생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지점장은 "아쉬움이 크지만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자 한다"며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함께 겪고 남은 동기 400여명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인호 기자 sinryu00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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