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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나무가 돌을 깨뜨리네/우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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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들이 돌을 지나가네
 돌과 돌 사이
 침묵인지 침식인지 알 수 없는 무게가
 커다랗게 자라네
 그때마다 말을 삼켜 버린 돌덩어리
 세상이 쿵쿵 밟고 지나간 자리
 돌이 가슴에서 자라는
 어느 여자의 역사를
 누군가 가만가만 들여다보네
 아직 읽지 못한
 낯선 돌 하나
 이 무거움을 들고 들어가는
 깊은 동굴보다 더 어두운 생들은
 어디서 단단해지나
 오랫동안 들끓다
 딱딱해져 짓이겨도 분해되지 않는 돌
 끊임없이 커져 가는 돌의 심장
 뿌리를 내놓고
 나무가 돌을 깨뜨리네
 웃고 있네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던가, 어쩌다 엄마의 가계부를 읽었던 적이 있다. 정확히 밝히자면 가계부 한 귀퉁이에 엄마가 적어 둔 두세 줄짜리 문장들을 훔쳐본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드문드문 쓴 엄마의 일기였던 셈이다. 다가오는 집안일을 앞두고 돈 걱정에 잠이 안 온다는 이야기, 옆집 아줌마와 장을 보러 갔다가 앉은자리에서 통닭 한 마리를 다 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도대체 이놈이 내 자식인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한참 나중에 안 일인데 그동안 나는 그 '이놈'이 내 동생인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살았었다. 그런데 제법 길게 쓴 어느 하루의 이야기는 요컨대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즉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고 나서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단문들로 쓰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라는 말을 그 문장들 뒤에 꼬박꼬박 연이어 쓴 것이었는데, 그때 내가 느낀 건 이물감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미 그때도 직감하고 있었고 지금도 문득문득 되새기고는 있지만, 결코 외면하고야 마는 진실은 "그때마다 말을 삼켜 버린 돌덩어리"가 엄마 가슴속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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