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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도시이야기]현대사의 빛과 어둠 깃든 장충단

최종수정 2017.12.08 10:30 기사입력 2017.12.08 10:30

두 남자의 도시이야기, 장충동
日, 항일운동 막으려 공원화
권력자 입맛따라 호텔 짓기도


1973년 남산쪽에서 촬영한 장충동 테니스장 일대 전경(자료:서울시)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한국을 찾은 국빈을 위해 고급숙소가 필요하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 서울 중구 장충동 일대 신라호텔 인근에 영빈관을 짓기 시작한 게 1959년. 영빈관은 4ㆍ19 혁명, 5ㆍ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두번이나 공사가 중단됐다가 이후 1967년 완공됐다. 이 전 대통령이 이 터를 점찍은 배경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보다 앞서 대한제국 시절 장충단(奬忠壇)이라는 제단이 있었고 일제 때는 박문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국립묘지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 동명의 유래가 된 장충단은 고종이 1900년에 붙였다. 조선 개국 이래 순국한 장사를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고 했으나 실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할 당시 죽은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다. 항일감정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자 일제는 공원으로 만들었다. 당시 남산 일대 거주하는 일본인이 많았던 영향도 있었을 테다. 이후 들어선 박문사는 조선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박문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철거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어받아 영빈관을 완공했고 정부가 운영했지만 이내 민간으로 넘어갔다. 일정한 가격을 매겨 입찰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지금 시각으로 보면 특혜 논란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1973년 당시만 해도 국영기업이나 자산이 민간에 불하되는 게 흔한 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1960년대 후반에 영빈관 일대 부지를 삼성 계열사였던 임페리얼에 불하했기에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운 모양새가 됐다.

당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호텔경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요청'에 응했고 일본 유수의 호텔로부터 운영방식 등을 배워오는 등 공을 들였다. 그렇게 들어선 신라호텔 외에도 당시 공원부지였던 일대를 여기저기에 불하하거나 개발한 결과 중앙공무원교육원, 자유센터, 타워호텔, 재향군인회관이 장충동 일대에 자리를 잡게 됐다.
지금은 체육관이나 족발이 유명한 동네지만 일제 때부터 고급주택이 즐비했던 데다 한국 현대사에선 상징적인 사건의 현장이 되는 등 의미심장한 곳으로 꼽힌다. 장충체육관 맞은 편은 이병철 전 회장이 생애 말년을 보내기 전 살던 주택이 있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청운동에 살기 전 장충동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7년 민정당 대선후보로 당시 노태우 총재가 추대된 곳이 장충체육관이며 그에 앞서 유신체제를 상징하는 체육관선거도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한다.

서울 도심 내 첫 한옥호텔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신라호텔의 신축공사는 이르면 다음 달 중 건축심의를 거쳐 내년 하반기께 공사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유서 깊은 곳에 들어서는 새 호텔은 기존 계획보다 층이 하나 낮아졌지만 면세점을 포함한 부대시설이 대폭 늘어난 게 눈에 띈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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