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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도시이야기]100년만의 광복 맞은 남산 예장자락

최종수정 2017.11.24 12:20 기사입력 2017.11.24 12:20

도시이야기 서울 중구 예장동
일제 치하 신궁·日人 거류지
도시재생으로 제모습 찾을까


1967년 촬영한 남산 일대 무허가건물(자료:서울시)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혹은 그보다 앞서 일본 제국주의 손길이 닿지 않았더라도 서울 남산은 오롯이 자연 그대로 산의 모습을 갖고 있긴 힘들었을 테다. 서울의 한 가운데 있어 전국의 어느 산보다 많은 사람이 찾는 데다 눈길이 잘 닿는 만큼 과거 권력자가 전시성 행정을 펼치기 위한 주 무대로 활용코자 했기 때문이다. 이권을 노린 자본의 탐욕이 곳곳에 배어있는 한편 억압과 폐쇄, 권위의 상징 옛 중앙정보부가 있던 터이기도 하다. 지금의 퇴계로 일대에서 남산쪽을 바라볼 때 마주하는 중구 예장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예장동이란 동명은 옛 마을이름 예장골에서 따왔다. 조선시대까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이었고 무예장을 줄여 예장이라 했던 데서 유래했다. 과거 임진왜란 때 왜장 마스다 나가모리가 남산 중턱 일대에 진지를 구축해 터가 남아있다고 해서 일제 당시 왜성대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0~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쪽 공무원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남산파괴'가 일제 때 시작했다고 단언한다. 직접적으로는 남산 기슭에 참배를 위한 조선신궁을 짓기 시작한 1920년. 참배객을 위해 신궁 주변에 도로를 내고 일대 공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고종 때 맺은 한성조약에 따라 1885년 남산 중턱 녹천정 자리와 일대를 일본공사관과 영사관 부지로 내줬다. 같은 해 진고개 일대, 오늘날 중구 예장동과 주자동, 충무로1가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정했다.

당시만 해도 4대문 밖이었던 데다 진흙지대로 거주환경이 나빠 당시 조선 관리들도 쉽게 수긍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해 100명이 채 살지 않았는데 이후 꾸준히 늘어 1910년 말께 들어선 8794가구, 3만4468명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이후 이곳에 터를 잡은 일본거류민회는 남산 일대에 공원과 군사시설, 신사를 잇따라 만들었다. 우리 정부의 친일각료도 힘을 보탰다.
일제 때 폐교된 숭의여학교를 부활하고자하는 움직임이 한국전쟁 중 생겨났고 전쟁이 끝나기 전 1953년 4월 재단법인 숭의학원이 인가를 얻었다. 이북5도 출신으로 여성ㆍ기독교계를 대표하던 박현숙 초대 이사장이 주도했다. 학교터를 찾던 중 남산 중턱의 경성신사 자리를 점찍고는 당시 사실상 점거하고 있던 최기석 군경유자녀보육원장과 교섭에 들어갔다. 국유지였음에도 최 원장이 미리 점검하면서 고아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 협상 끝에 1954년 6월 중구 예장동 산5번지 일대 경성신사 터에 숭의학원이 자리를 잡았다. 터는 생겼지만 건물을 올리긴 쉽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이나 당시 서울시장은 어떻게든 허가를 내주려고 한 반면 담당 공무원들은 공원용지였던 탓에 완강히 맞섰다. 지난한 협상 끝에 몇 가지 조건을 달아 결국 허가가 났다. 가건축일 것, 언제든 철거 가능할 것, 시의 설계에 순응할 것 등이 조건이었다. 건축허가가 나기 전부터 이미 공사에 들어갔고 미군 공병이 도왔다. 이후 10여년 간 꾸준히 부지를 넓히고 시설을 늘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예장동 일대 도시재생을 추진하면서 '한 세기 만의 광복'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다. 남산 제모습 찾기계획은 앞서 199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추진됐는데 그 성과를 체감하는 서울시민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민성 회복을 기치로 내건 이번 예장자락 재생사업에 한번 더 기대를 거는 이유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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