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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68] 매향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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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여덟 개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거대한 꽃잎 같습니다. 네 개씩 등을 맞대고 앉은 모습이, 네잎 클로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닷가에 피어났으니, '해당화' 두 송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유소년과 여성들이 주인인 야구장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화성 드림파크'.

 광활한 야구공원 울타리 밖은 논밭, 그 너머는 서해바다입니다. 들판 위로 청둥오리 떼가 날아오릅니다. 떨어진 낟알이 많을 테니 먹을 것이 많겠지요. 새들이 날아가는 바다 저쪽으로, '농(籠)섬'이 보입니다. 6.25가 한창이던 1951년부터 줄곧, 전투기의 훈련 표적이었던 곳입니다. 이른바 '쿠니 사격장'.
 2005년까지 온몸으로 총탄과 포탄을 받아내던 섬입니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 포화에 시달린 몸이 기울어가는 저녁 햇빛에 더욱 처연해 보입니다. 겨울이 오면 화상(火傷)의 아픔도 더 커져갈 것입니다. 시리고 쓰릴 테지요. 야구장 입구 고갯마루 전시관에 그 고통을 가늠케 하는 증거물들이 있습니다.

 시뻘겋게 녹이 슨 연습탄과 포탄껍질들입니다. 사격장이 폐쇄된 뒤에, 갯벌에서 수거한 것들이지요. 고요한 바다를 불바다로 바꿔놓은 괴물들입니다. 야만과 폭력의 시간이 남긴 잔해입니다. 신동엽 시인이 '가라, 가라'고 그토록 저주하던 물건들입니다. 사라져야 할 모든 쇠붙이, '가야할 껍데기'들입니다.

 뭍과 물 가릴 것 없이 무참히 찌르고 난도질하던 '불 칼'입니다. 이제는 대부분 고철로 널려 쌓이거나, 고깃덩이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마른하늘에 천둥 벼락이 끊이지 않았을 '매향리(梅香里)' 수난의 역사가 한눈에 읽힙니다. 그저 숨죽여 울기만 했겠지요. '매화 향기'가 어찌 '화약 냄새'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깨지고 부서진 흉기들 중엔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지난 날의 치욕을 지우고 싶어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날개를 달고 새가 되었습니다. 어떤 것은 '아이언 맨'의 형상으로 우뚝 섰습니다. 재생, 아니 신생(新生)입니다. 어떤 쇠가 제 스스로 파괴의 도구가 되고 싶었겠습니까. 참회와 속죄의 몸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목숨을 잃은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게임 속 삶이야 무한정 반복되지만, 생명체에게 두 번의 삶은 없습니다. 야구선수가, 도루를 하다 아웃되었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통일 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죽은 '한스'나 야생의 새들은 여태 돌아오질 않습니다.

 희생된 생명의 귀환 여부가 '전쟁놀이'와 '평화의 게임'을 구분시킵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매향리가 더 이상 끔찍한 놀이판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대신에 이 바다마을이, 이 나라 야구계가 그토록 염원해온 꿈의 그라운드를 품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구장'이 떠오릅니다. 관중석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경기장입니다. 메이저리그 중계방송 카메라에 비친 풍경만으로도 마냥 부럽던 곳입니다. 홈런 볼을 차지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바다에 떠있기도 하는 사람들을 본 기억도 있습니다. 거기서, 박찬호 선수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요.

 스포츠의 무대가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어울린다는 것은 무척 멋진 일입니다. 아시아 최대의 유소년 야구장, 드림파크가 그런 곳입니다. 저까지 가슴이 설렙니다. 이곳이 어떤 프로 야구팀이나 특수한 집단을 위한 공간이 아닌 까닭입니다. 기약도 없이 미뤄지기만 하던 어른들 숙제 하나가 속 시원히 해결된 까닭입니다.

 물론, 늦은 감이야 없지 않지요. 연간 800만 명의 관중이 모이는 인기종목에, 미래를 위한 투자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투혼만을 강조하며 내일의 주역을 키웠습니다. 참고 견디는 법만 너무 많이 가르쳤습니다. 번듯한 리틀야구장 하나 지어주지 못하면서, 큰 선수가 나오기만을 바랬습니다.

 이제 어린 선수들에게 조금은 덜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맘껏 던져라, 독수리처럼 내리꽂히는 강속구를 보고 싶다. 힘껏 쳐라, 저 바다 위를 날아가는 공을 보고 싶다." 공장을 세우거나 아파트 단지를 앉힐 수도 있던 땅에 야구장을 지어 선물한 어른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를 지어, 어린이들에게 전한 시인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바다 해(海)'자에 '어미 모(母)'자가 들어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레 되새겨봅니다. 가진 것 다 내어주며 이 마을을 먹여살려온 어머니, '매향리 바다'가 이제 야구로 세상을 흔들고 싶은 소년소녀를 키웁니다.

 이 부근은 낙조(落照)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바다. 질곡의 세월을 뒤로 하고, 무심히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저녁 해를 봅니다. 온통 황금빛입니다. 이 바닷가에서, '박찬호'와 '이승엽'이 줄지어 나올 것임을 암시하는 태양의 문장(紋章) 같습니다. 2008년 북경 올림픽 야구 금메달도 저런 빛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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