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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ounter]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인문·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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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서거, 초연, 10, 50, 100주년…, 기념과 추모라면 언제나 열의를 잃지 않는 예술계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인 올해 왠지 조용했다. 소비에트연방에서 러시아로 이어진 역사 속에 기억된 이념의 온도차 때문이거나, 북한으로 가로막힌 지리적 환경이 주는 심리적 거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 러시아 예술을 살펴보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남긴 유산으로 우리의 문학과 예술 역시 살쪘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술이란 늘 무언가의 조상이자 후손 아닌가.

 2017년이 저물기 전에 혁명의 향기를 전해줄 책 두 권이 나란히 발간되었다. 그 중에서도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인문ㆍ예술'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논문 열 두 편을 담고 있다.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박종소 교수가 엮고,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문학'이란 총론을 썼다. 이 글은 1917년 혁명 당시 문학적 상황을 미시적으로 살피고 있다. 러시아 혁명이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전 부문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대변혁이었던 것과 달리, 러시아 문학의 주된 경향은 189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의 연속선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1917년의 혁명은 1925년 무렵까지 러시아 문학에 내적인 변화의 동력을 꾸준히 주입하여 오히려 이후 소비에트 연방 시대의 새로운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1917년의 혁명은 차르 제국의 전면적인 붕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혁명의 주도세력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지금까지 문화를 독점해온 부르주아 계급을 정치적으로는 타도했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구축해 온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단시일 내에 극복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혁명 직후 소비에트 문단의 주도권을 행사한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부르주아 출신의 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은, 예술에 있어 '최후의 일격'이기보다는 변화의 풍원(風原), 나비효과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혁명이 그 자체로 정치적 임계점을 현시했을 때, 러시아를 포함해 유럽 전역을 휩쓸던 미학적 전위들은 예술이 예술의 이름으로 갈 수 있는 한계치를 보여주었다. 정치적 혁명과 미학적 혁명이라는 두 현상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며,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와 문화, 역사와 예술, 혁명과 미학은 강렬하게 스파크를 일으켰다."(본문중)

 책에 실린 논문 열두 편은 혁명이라는 렌즈의 줌을 당겨, 문학, 시, 디자인 등, 인문 예술 분야의 각 지점들을 응시한다.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문학이다. 이병훈은 '러시아 혁명과 문학비평의 두 방향'에서 1920년대 소비에트 비평의 주요 쟁점들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독자성 논쟁'과 '동반자 작가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문화예술의 본질과 특징을 두고 벌어진 다양한 논쟁과 실험들이 스탈린 체제에 이르러 어떻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으로 귀결되고 마는지 살펴본다.
 이장욱은 '러시아 혁명과 시'로 20세기 초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배경으로 '은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네 명, 즉 알렉산드르 블로크,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안나 아흐마토바, 세르게이 예세닌을 자세히 소개하며, 이들을 통해 정치와 예술의 화합적 접목을 고찰한다. 반혁명적인 작품으로 비판받아온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를 서사시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과 비교함으로써 논의하는 박혜경의 '혁명의 서사시', 10월 혁명 직후의 모습을 그린 블로크의 시 '열둘'이 혁명에 대한 송가인가 비가인가를 분석하는 차지원의 '혁명과 상징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유토피아 기획에서 가장 급진적인 텍스트로 간주되는 흘레브니코프의 서사시 '라도미르'에 나타난 미래주의 유토피아 세계를 분석하는 김성일의 '혁명과 유토피아' 등은 러시아 혁명과 시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 문학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흔적을 찾은 글도 있다. 손유경의 '혁명과 문장'이다. 최인훈의 '화두'에서 그의 명문(名文)과 혁명의 관계를 사유하는 독특한 관점에 주목한다. 최인훈이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린 러시아에서 새삼 혁명과 문장의 관계를 곱씹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은 혁명의 순간을 예견하는 '명문의 수행성'에 대한 최인훈의 경탄 어린 시선에 집중한다.

 한편, 70년이 넘는 소비에트 체제는 러시아어의 양태를 크게 바꾸어 놓았는데, 그 시작을 10월 혁명에 둔 송은지의 '러시아어에 나타난 혁명의 파토스와 에토스'가 있다. 러시아 혁명 후의 정치, 사회적 변동과 공진화한 언어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 그러한 변화가 가져온 이율배반적 측면을 분명하게 드러낸 글이다.

 혁명과 소리와 혁명과 이미지에 대한 논문 두 편 역시 인상적이다. 김수환의 '혁명과 소리'는 소비에트 몽타주-아방가르드 영화의 전성기라 불리는 1910~1920년대가 아니라, 혁명적 아방가르드의 쇠퇴기로 간주되는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에 초점을 맞춰, 이 시기 세계 영화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운드의 도입이 혁명의 땅 소비에트에서 가졌던 특별한 함의를 살펴본다. 김정희의 '권력과 이미지'는 레닌과 스탈린 시대의 포스터 속 레닌 이미지의 특징과 변화를 각 시기의 정치·사회 상황, 정치 이념과 선전 방식과 연결시켜 분석하여 통치자 이미지의 제작과 사용에 작용한 정치적 전략의 성격을 밝힌다.

 혁명과 정치에서 마음은 어떻게 문제화되는가? 최진석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논쟁과 마음의 정치학'은 보그다노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화이론을 역사적 논쟁과 발생사적 맥락에서 살피며, 그것과 마음의 정치학과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문화이론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정치의 핵심적 고리로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검토한다. 김민아는 '인텔리겐치아와 혁명'에서 1905년과 1917년 혁명에 반대한 일련의 지식인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이 혁명에 반대하고 이를 비판한 이유,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운명을 맞이했는지를 재조명한다.

 이 책은 정치적 혁명이 야기한 '미학적 혁명으로서의 러시아 혁명'을 되짚고 있다. 100년 전에 일어난 혁명은 시대마다 다른 물줄기를 타고 흐른다. 물이 흐른 자리를 따라 비옥해진 토양 위에 '오늘'이라는 새로운 조건이 있다. 그 위에서 우리는 100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혁명의 여진을 느끼고 있다.

허영균ㆍ공연예술 저술가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2
김민아, 김성일, 김수환, 김정희, 손유경, 송은지, 박종소, 박혜경, 이병훈, 이장욱, 차지원, 최진석 지음
문학과지성사
2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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