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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JSA]②죽거나 망명하거나…JSA 귀순 잔혹사

최종수정 2017.11.15 09:06 기사입력 2017.11.15 09:06

판문점 귀순 북한 고위 언론인, 이중간첩으로 2년 만에 사형…왜?

1953년 정전협정 당시 판문점의 모습. 양쪽에 도열한 연합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 dva.gov.au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지금은 남북 분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소지만 본래 판문점은 의주가도와 사천이 만나는 마을로 초가집 몇 채와 주막 하나가 전부였던 작은 동네, ‘널문리’였다.

6.25 전쟁 중 정전협정 합의가 이뤄지면서 휴전회담 장소가 개성에서 널문리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판문점은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다. 당시 회담에 참석한 중공군 대표들은 이 한가로운 마을을 다시 찾기 어려울 것에 대비해 회담장 부근 주막을 ‘판문점(板門店)’이라 표기했고, 여기서 오늘날의 명칭이 유래했다.

북한 국영통신사 조선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은 귀순 후 남측의 열렬한 환대와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나 2년 뒤 이중간첩으로 몰려 사형됐다. 사진 오른쪽이 귀순 당시 이수근, 사진 왼쪽은 당시 국민 여배우 최은희.

격발 뚫고 넘어온 귀순인사의 비참한 최후

1953년 휴전협정 조인 후 포로교환이 이뤄질 만큼 남북 간 인적교류가 가능한 곳이었던 판문점에서 처음 총격전이 벌어진 것은 1967년이었다. 그해 개최된 제242차 군정위원회에 취재차 참석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의 기습 귀순 때문이었다.

북한 국영통신사 부사장의 귀순은 황장엽 귀순 이전 가장 높은 직책 인사의 귀순으로 꼽힌 일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수근은 2년 뒤인 1969년 이중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맞았다.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미국군 특별고문이었던 제임스 리는 이수근을 두고 “그는 개인문제로 귀순했으나, 조금도 변하지 않은 공산주의자였다”고 회고했다.
1984년 당시 소련 관광안내원인 마투초크의 판문점 망명 경로. 사진 = 국방TV 화면 캡쳐

소련 엘리트 관광안내원의 망명과 총격전

1984년 소련 관광안내원 바실리 마투조크는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면 촬영 중 돌연 건물 사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갑작스러운 망명을 시도했다. 이를 지켜본 북한군은 권총을 발사하며 그의 월남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마투조크를 쫓아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자유의 집 앞에서 30여 분간 총격전을 벌였다.

다행히 마투조크는 살아남았으나 한국 카투사 장명기 일병이 전사했고, 미 육군 1명도 부상을 입었다. 북한은 3명이 전사, 5명이 부상을 입은 끝에 교전은 종료됐다. 판문점에 일어난 최대 규모 사건이었으나 사건의 주체가 미국과 소련이었던 탓에 잊힌 사건이 됐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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