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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유화로 부활한 고흐, 거칠게 그려낸 고뇌

최종수정 2017.11.09 12:43 기사입력 2017.11.09 12:43

세계 첫 유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파격적 시도<br>결이 곱지 않은 질감으로 내면의 엄숙미 표현<br>고흐 그림 속 인물 통해 삶과 죽음 동시에 투영

영화 '러빙 빈센트' 스틸 컷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정신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려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요(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돈 맥클린(72)이 부른 '빈센트'는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앞에 놓고 그의 정신을 회상하면서 현대의 부조리와 불합리성을 읊조린 노래다.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뛰어난 예술정신을 이해받지 못한 고흐를 예수와 같은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노래했다.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지독한 사랑과 그 사랑만큼 지독한 세상의 외면. 보통 사람들과 너무나 닮았기에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영화 '러빙 빈센트' 스틸 컷

도로타 코비엘라·휴 웰치맨 감독의 '러빙 빈센트'는 이 서로 좋아하는 관계의 근원에 다가가는 영화다. 고흐의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그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비춘다. 고흐는 1890년 7월29일 새벽 1시30분 오베르의 한 여관에서 총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화 '아르망 룰랭의 초상(1988년)' 속 룰랭이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양한 인물들을 만난다. 그의 아버지인 조셉 룰랭을 비롯해 고흐의 후원자이자 의사인 폴 가셰, 고흐를 그리워하는 가셰의 딸 마르그리트, 고흐가 묵었던 라부 여관의 주인집 딸 아들린 라부 등이다. 모두 유화에 그려진 그대로 등장해 배우들의 연기로 이어진다. '별이 빛나는 밤(1889년)', '아를의 노란 집(1888년)',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1888년)',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년)' 등의 다양한 풍경에 젖어들어 고흐를 추억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화가 107명이 재현한 유화의 배경은 아를과 생-레미, 오베르 쉬즈 우아즈다. 고흐가 생의 마지막 3년을 보낸 곳들이다. 고흐는 아를에서 자신을 포함한 스물세 명의 초상화를 마흔여섯 점 그렸다. 주문된 것도, 강요된 것도 아니었다. 친절한 이웃이나 들판의 농민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피사체였다. 그들의 개성을 어떤 허식 없이 간결하고도 직접적으로 나타냈다. 후기 고야의 인물처럼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를 응시하거나 외면하는 모습으로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 보통사람들에 대한 열정과 경험에 근거한 애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거 초상화에서 신비롭거나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자 사용한 짙은 음영·부드러운 색채·피부의 분장 등을 말끔히 지우고, 결이 곱지 않은 물감의 질감으로 거친 피부를 자유롭게 표현했다. 게다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배경을 추상적으로 장식해 어떤 절대적인 내면의 엄숙미를 부여했다. 노랑은 순수와 사랑이며, 파랑은 시비한 밤하늘 같은 무한을 뜻했다.

영화 '러빙 빈센트' 스틸 컷

생-레미와 오베르에서는 풍경에 주목했다. 하숙집 근처의 좁은 집, 초가집, 별장 등을 그리다가 야외의 광활한 보리밭, 허물어진 성, 강변 등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 정사각형을 두 개 이은 크기의 긴 캔버스에 파노라마처럼 풍경을 그리기 시작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에 빨려들 듯한 효과를 줬다. 이 구도에 해를 전혀 넣지 않았고, 나무·나무뿌리 등을 화면에 가깝게 가득히 그려 응축된 느낌을 강조했다. 시골 풍경이나 밀밭을 그린 그림에 작은 길이나 도로를 끊어진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다른 화가들의 특색을 받아들이면서 나름의 방향을 필사적으로 모색했다. 새로운 실험을 할 만큼 그는 심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그의 모델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이유일 게다.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

하지만 고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을 맞는다. 자살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작인 까마귀가 있는 밀밭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림 속 풍경에는 세 개의 길이 나 있으며, 하늘에는 불길한 느낌의 까마귀가 먹구름 아래를 날아다닌다. 마치 고흐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밀밭 장례 행렬의 동판화를 연상케 한다. 불행한 화가의 마지막 절규로 인식돼 그가 야수파, 표현파, 추상 표현파 등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함께 그려진 '구름 낀 하늘 아래의 밀밭(1890년)'은 녹색과 황색의 대지가 수평으로 놓이고 백색과 청색의 하늘이 무한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강하다.

영화 '열정의 랩소디' 스틸 컷

미스터리에 가까운 러빙 빈센트는 가셰의 입을 빌려 전자에 무게를 둔다.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해 고군분투한 동생 테오에 대한 부담을 부각한다. 고흐는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이 팔렸는데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타들어가는 심정은 그가 1890년 7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니. 기분을 바꿔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 삶도 뿌리에서부터 위협받고 있으니 발걸음조차 비틀거릴 수밖에. (중략) 가능한 빨리 이 그림(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너에게 가져갔으면 한다. 이 그림이 말로 할 수 없는 내 감정을 네게 전해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반 고흐' 스틸 컷

그동안 고흐를 다뤘던 영화들도 모두 자살로 결론을 낸다.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열정의 랩소디(1956년)'에서 커크 더글라스는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고흐의 고뇌와 고독을 그린다. 그러나 강인한 체구와 얼굴로 다소 과장된 연기를 해 고흐의 내면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하다. 모리스 피알라 감독이 연출한 '반 고흐(1990년)' 속 자크 뒤트롱는 얼굴이 내성적이고 체구도 작다. 하지만 너무 지적이고 세련돼 보여 독특한 야성을 풍기는 고흐의 체취를 표출하는데 한계를 드러낸다.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빈센트(1990년)' 속 팀 로스도 야비하고 속된 분위기 탓에 고흐와 어울리지 않는다. 심리극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다만 다른 고흐의 소설·영화와 달리 화가로서의 고흐와 화상으로서의 테오를 극명하게 비교하면서 당시 화가들과 화랑의 분위기를 비판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이 영화들은 고흐가 죽기 나흘 전에 쓴 마지막 편지를 부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은 욕구와 화가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이다. 고흐는 고갱과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며 물감도 주문한다. 다양한 죽음의 이유들이 거론되지만 어느 것이나 추측에 불과하다. 불확실한 판단으로 각인된 신비화된 삶이 고흐에게 '정열의 화신'이라는 수식어를 안긴 셈. 그것은 그와 우리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을 준다. 고흐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벗이 되길 바랐다.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그림들을 통해 말을 건네고 있다. 어쩌면 그 답을 듣고 싶어 너무 일찍 하늘의 별이 됐을지도 모른다. "죽어서 묻혀버린 화가들은 그 후대에 작품으로 말은 건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중략)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겠지(1888년 6월 고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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