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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검 삼국지]②2차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도'를 최고의 전리품으로 취급한 까닭은?

최종수정 2017.09.08 12:42 기사입력 2017.09.08 11:45

일본도를 대량 압수한 미군 모습(사진=위키피디아)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출전했던 미군들에게 최고의 전리품으로 인기가 높았던 것은 일본도(日本刀)였다. 일본군이 전술무기로 각 사병들에게 지급한 보급용 도검 뿐만 아니라 일부 귀족계층 장교들이 가지고 나온 명검이 습득되면 서로 가지려고 경쟁했었다고 한다.

이것은 19세기 이후 일본도가 실용적 목적의 무기보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나의 값비싼 예술품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국최고사령부(GHQ)가 들어서자 당시 사령부는 일본 귀족 및 사무라이 가문들이 보존하던 4000여자루의 명검을 압수하기도 했다. 이후 이 검들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문화재로서 가치가 적은 군도는 모두 압수해 용광로에 녹인 사령부는 일본 내에 모든 명검도 압수코자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재나 예술품에 가깝다는 일본 측의 강력한 항의에 전량 압수 계획은 취소됐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때의 일을 두고 역사상 세 번째로 발생했던 '칼사냥(刀狩り)'이라고 부른다.

오사카성에 위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 그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일본 전토를 통일한 이후 민간의 칼을 압수해 녹여 농기구를 만든 일명 '칼사냥(刀狩り)'을 실시했다.(사진=위키피디아)

칼사냥은 일본 역사에서 정부가 민간의 칼을 대규모로 압수했던 사건을 의미한다. 첫 번째 칼사냥은 1590년, 당시 일본 천하를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농민반란을 막고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든다며 벌였던 칼사냥이다. 두 번째는 메이지 신정부가 1868년 들어선 이후, 사무라이들에게 폐도령(?刀令)을 내렸던 일이다. 이 폐도령은 이후 1874년부터 1877년까지 이어진 사무라이들의 반란에 주요 동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칼사냥 이후에도 일본 내에서는 명검의 예술적 가치가 계속 인정되고 여전히 칼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고가의 명검을 만든다. 일본 내에서는 물론 유럽 및 미국 등 서양의 명검 매니아들이 비싼 돈을 주고 사기도 한다. 도검 자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칼날에 새기는 독특한 문양으로 인해 예술품으로서 사랑받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형태의 일본도 모습. 중국 당나라 때 사용하던 당대도의 디자인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사진=위키피디아)

그러나 실전 무기로서의 일본도는 동양 내에서 그렇게 뛰어나거나 독창적인 무기로 취급받진 않는다. 디자인 자체가 7세기 중국 당나라의 주요 도검이었던 '당대도(唐大刀)'를 베낀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과 한국의 도검이 주변 유목민족들의 침략, 교류와 함께 영향을 받아 바뀌었지만 외부세력과 교전이 거의 없고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지 못한 섬나라 일본은 이 당대도 양식이 그대로 전승됐다. 워낙 오래된 디자인이 그대로 살아남다보니 그 자체로 독특한 디자인이 돼버리고 만 것.

이 일본도는 전통 방식 그대로 여전히 대를 이은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일본도에 사용되는 철은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가 공급한 철로 만들 수 있으며 수백만번의 담금질을 통해 날을 다듬는다. 모래 성분이 많이 함유된 사철(沙鐵)을 제련해서 만들다보니 주조 및 담금질이 용이하고 일본도 특유의 무늬인 '하몬(刃文)'을 넣기도 좋지만 강도는 다소 약한 편이다. 이전 왜란 당시의 기록들에서 조선 환도와 부딪혀 깨졌다는 기록이 많은 이유다. 대나무 같은 것을 잘못 베다간 이가 빠지기도 하며 다른 동아시아 도검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무른 편이라 잘 망가진다. 사무라이들이 예부터 괜히 칼을 두 자루씩 차고 다니던 것은 아닌 셈이다.

특유의 문양인 하몬(刃文)이 들어간 일본도(사진=위키피디아)

그러다보니 일본도는 실전용보다는 장식용이자 도검 수집가들의 수집품으로 동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12세기 송나라 때부터 일본의 주요 무역품 중 하나로 일본도가 중국에 도입됐고 조선에도 왜검(倭劍)이란 이름으로 수입됐는데 무기로서 관심을 받진 못했다. 16세기 중엽 일어난 삼포왜란까지만 해도 조선군은 활이나 대포 등으로 사무라이들을 쉽사리 제압했기 때문에 일본도의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접이 많이 달라진다. 조총 사격으로 조선군의 대형을 흐트러뜨린 이후 일본도로 진격한 사무라이 부대에게 크게 패했던 조선군은 일본도를 대거 제식무기로 채용했고 제작법과 검법을 배우러 사신단에 기술자들을 보내기도 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들어온 일본도를 진상품으로 요구하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18세기 이후부터는 장식품이나 진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미 주요 무기가 개인화기인 총기로 넘어간데다 산악지형이 많고 백병전보다는 원거리 전술이 우선시되는 한반도 지형상 길고 무거운 일본도가 실전용으로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철 비중이 높은 일본도 특유의 낮은 강도도 계속 문제로 남았다. 아름다운 사무라이의 상징일지는 몰라도 백전백승을 담보할만한 우수한 무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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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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