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 김은별 특파원] 늦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미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동하던 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철도에 탑승한 순간 한 노인이 옆자리에 앉았다. 미국 석유회사의 로고가 박힌 모자를 쓴 노인은 아들을 만나러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미국인처럼 그는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석유회사에서 평생 돈을 벌었고 세 명의 자녀도 키울 수 있었다고, 미국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노력한 만큼 보상해 주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냐며 말문을 열었다. 뒤이어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일자리를 미국인들에게 더 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기쁜 일이라고 덧붙였다. 힘들게 키운 자식들은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말도 이었다.
약 30분간 이어진 그의 말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미국인들 중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절반 정도는 아직도 이 정책을 지지한다. 석유ㆍ석탄ㆍ철강산업 일자리가 없었다면 자신과 같은 세대가 아들 딸을 로스쿨, 메디컬스쿨에 보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 특히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지지주)'에 있는 이들은 너무 순진해 빠졌다. 십만달러 가량을 쏟아부어 학위를 받고도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면서도 미국 우선주의 정책엔 반대한다니, 이처럼 연약한 생각이 어디 있냐는 주장이다.
지극히 백인 중심적이고 미국인 우월주의적인 그와의 대화는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우린 어린 시절부터 '이제는 글로벌 시대',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국제화와 세계화의 차이가 뭐꼬?(김영삼 전 대통령)", "국제화를 세게 하면 세계화입니다.(YS정부 청와대 참모)", "세게 하래이.(김 전 대통령)". 이 일화가 유명한 농담이었을 정도로 90년대 우리는 글로벌화에 발맞추기 위해 뛰었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이후엔 개방을 통해 손해를 보더라도 선진국 위상에 맞춰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기차에서 만난 이 노인처럼, 미국인을 비롯한 유럽인, 중국인들까지도 요즘은 각 국가가 자신만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우리가 지금껏 생각하고 배운 세계화, 글로벌화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 것 아닐까 하는 느낌까지도 받았다.
뉴욕 김은별 특파원 silver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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