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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잔다르크는 정말 치마로 된 갑옷을 입었을까?

최종수정 2017.08.15 08:00 기사입력 2017.08.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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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위키피디아)

(사진=위키피디아)


3.1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구국의 위업으로 뛰어든 계기는 '잔다르크(Jeanne d'Arc)' 이야기를 위인전에서 본 이후였다고 한다. 유 열사는 친구들에게 항상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라고 이야기했으며 잔다르크의 일대기는 그의 삶과 가치관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잔다르크란 인물에 투사된 '구국의 소녀'란 이미지는 유관순 열사뿐만 아니라 구미열강의 식민치하에 놓였던 제3세계 국가들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한창 뜨겁게 전개되던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함께 영향을 끼쳐 강인한 여성으로의 이미지로도 활용됐다.
하지만 전쟁사적으로 봤을 땐 잔다르크란 인물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프랑스 동부 알사스-로렌 지방에 속한 동레미(Domremy)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17세의 소녀가 정말 온갖 초상화에 그려진 것처럼 치마까지 철갑을 두른 갑옷을 입고 선봉장이 되어 영국군을 물리쳤을 것이냐는 의문이다.

갑주를 입은 잔다르크 그림(사진=위키피디아)

갑주를 입은 잔다르크 그림(사진=위키피디아)


일단 당시 프랑스 시골마을의 17세 소녀라고 하면 평균 키는 140~150cm 정도에 몸무게는 30~40kg 정도에 불과했다. 그 당시로서도 정말 아담한 여인인 셈인데 이런 여인이 상체 갑주만 30kg이 넘는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거대한 기병용 랜스를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했으리라 생각하긴 매우 어렵다.

당시 최고급 플레이트 갑옷의 경우, 아무리 경량화가 이뤄진다해도 25kg 정도 나가는 무게였기 때문에 오랜 전투경험과 훈련으로 몸을 다져놓은 건장한 전사가 아닌 이상은 서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적으로 부담이 컸다. 이런 자기 몸무게랑 맞먹는 갑옷을 그저 시골 농부의 딸이 입고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이야기로 들린다.
잔다르크의 진격로. 오를레앙에서 트루아를 거쳐 랭스까지 파리를 포위하기 위한 무모한 우회기동작전을 폈으며 잔다르크의 이 작전은 잉글랜드군의 허를 찌르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잔다르크의 진격로. 오를레앙에서 트루아를 거쳐 랭스까지 파리를 포위하기 위한 무모한 우회기동작전을 폈으며 잔다르크의 이 작전은 잉글랜드군의 허를 찌르게 된다(사진=위키피디아)


이처럼 잔다르크의 갑옷을 과장된 이미지 설정이라 치부하더라도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잔다르크가 프랑스군 수뇌부에 제안한 매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다. 오를레앙을 함락시킨 프랑스군에게 잔다르크는 적군의 주둔지를 크게 우회기동하여 랭스로 진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를레앙에서 랭스까지의 우회로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이 통로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고 곳곳에 매복이 가능한 지역들이 많았으며 협공을 받을 경우 프랑스군은 전멸할 수도 있었다.

샤를7세의 측근, 장군들은 물론 잔다르크를 지지하던 동료들까지도 이 제안을 거부했는데 잔다르크는 끝까지 그곳엔 적군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를 믿고 진격한 프랑스군은 어떤 적군도 발견하지 못했고 우회기동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건 엄청난 도박과도 같은 작전이었지만 당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은 프랑스군이 그와같은 도박을 할 리가 없다 생각하고 모든 가용전력을 파리 인근으로 집결, 파리를 강력한 요새로 바꾼 뒤였다. 하지만 잔다르크가 이 전략의 허를 찔러 파리를 둘러싼 오를레앙, 트루아와 랭스를 함락시켜 파리를 고립시키자 잉글랜드군도 별 수 없이 물러나야만했다.

잔다르크 생전에 잔다르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스케치(사진=위키피디아)

잔다르크 생전에 잔다르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스케치(사진=위키피디아)


이런 무모하면서도 적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정말로 17세 시골뜨기 소녀가 입안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앞서 잔다르크가 출병할 때 보여줬다는 여러 기적들과 오를레앙 성을 함락시킬 때 잔이 기도를 드려서 바람의 방향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모두 삼국지연의 적벽대전 편에서 제갈공명이 부른 동남풍 이야기와도 같이 전설로 들릴 뿐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프랑스 군이 그녀를 일종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심점으로 쓴 점이다. 그녀의 무모한 작전은 막후에서 작전을 짜던 참모진이 짜줬을 수도 있고 정말 갑주를 입고 선봉에서 뛰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중요한 전투의 클라이막스 때마다 등장했으며 그녀가 나타나면 뒤에서 용이 불을 뿜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것으로 봐서 포병대와 함께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공성용 대포는 서유럽에 도입된 지 얼마 되질 않았고 제한적으로 쓰인데다 용이 불을 내뿜는 것으로 여길 만큼 병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양에서 용은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소환해 이끌고 다니는 마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잉글랜드군의 사기가 확실히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님의 은총이던 마술이던 간에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마녀'의 이미지는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주효했다는 것.

성을 함락시키는 잔다르크 모습 그림(사진=위키피디아)

성을 함락시키는 잔다르크 모습 그림(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결국엔 그녀의 명도 재촉하게 된다. 프랑스군의 마스코트로서 성장한 그녀의 인지도와 군사적 성공은 결국 프랑스 왕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결국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고, 그녀에 대한 명예회복은 그녀가 죽고 25년이나 지나서야 진행됐다.

오늘날과 같은 '구국의 성녀' 이미지로 추앙된 것은 그녀가 죽고 400년 가까이 지난 나폴레옹 시대부터 였다. 1803년, 나폴레옹은 당시 영국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애국심 고취를 위한 일종의 국가주의적 산물로 잔다르크란 인물을 이용했다. 이후 프랑스 역사에서 잔다르크는 보불전쟁,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에서 모두 프랑스를 구하는 여신으로 기억됐다.

파리 피라미드 광장에 위치한 잔다르크 동상(사진=위키피디아)

파리 피라미드 광장에 위치한 잔다르크 동상(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입김이 강했던 19세기 중엽, 교황청도 마녀로 화형에 처해져 죽은 그녀의 시성작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시성 움직임은 프랑스의 강력한 지원하에 결국 1910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됐고 10년 뒤인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 때 시성됐다. 생전에 마녀로 죽어 성녀가 된 유일한 역사적 인물이 된 것.

결국 이 동레미의 17세 소녀는 그녀가 죽은 이후 500년이 넘는 역사기간 내내 각종 정치세력에게 이용됐고 오늘날에도 프랑스 내 극우세력들의 강력한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프랑스 극우세력의 대표 정당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주요 유세지로 활용하는 곳이 파리에 위치한 잔다르크 동상 앞이며 그들은 잔다르크를 국내 일자리를 뺏는 외국인과 세계화로부터 프랑스를 지켜내는 영웅으로 묘사한다. 구국의 성녀는 죽어서도 결코 편히 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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