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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 이야기만으로도 눈물을 쏙 빼는 영화 하나

최종수정 2017.08.05 03:00 기사입력 2017.08.04 07:31

빈섬의 알바시네 '천국의 아이들'(1997,이란영화) - 가난은, 불행이 아니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무뚝뚝하게 말해버리면 참 싱겁다.
포스터의 영화 카피들이 그걸 말해준다.

"1등 보내고...2등도 보내고..."
"3등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
"동생은 오전반 오빠는 오후반 운동화는 한 켤레"

저것만 읽고 생각한다면,
어린이 마라톤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겠구나 하는 짐작이나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하는 애환을 다뤘나 보다 하는
짐작을 낳게도 한다. 물론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 영화의
결 고운 감동과 은근히 배어나는 체온같은 게
다 새나가 버린다. 영화를 보고난 뒤 난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잔뜩 혀끝에 고였었는데,
그러면서도 뭐라고 말하기가 군색했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직접 봐야, 메마른 눈자위를 은근히 묵직하게 한
힘이 뭔지를 느낄 수 있다.

'천국의 아이들' 중의 한 장면


감상기는 잘해봤자 차선이다.
한 영화평론가는 이란이란 나라의
공동체 의식이 운동화라는 매개를 통해
잘 돋을새김된 작품이라고 했던데, 그럴 듯 하다.
정말 이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고 골목과 집 구석구석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선의가 감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이미 눈치 챈 것이지만, 마지드마지디의 이 영화는
더 섬세한 결로 그걸 보여준다. 찢어질듯 가난하지만
삶의 원칙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 원칙의 우직함이 때로 무뚝뚝하고 무심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살짝 살짝 내비치는 마음의 실마리들은
따뜻하고 착하다. 나라 홍보를 하는 방식은
헐리웃처럼 떠들썩하게 성조기를 펄럭이며 애국적 메가폰을
쥘 수도 있지만, 이 영화처럼 가린 내면을 보일 듯 말 듯
드러내면서도 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후자가 훨씬
강렬하고 효과적이다.
'천국의 아이들'은 말이 별로 없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별로 말이 없다.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고 콩켸팥켸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 사회 분위기가 그런 것일까.
가난이 입을 틀어막은 것일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말하지 않고
그저 부드럽게 쳐다보는 일에 이미
천 마디 만 마디 이야기가 다 녹아있다.
시선이 곧 말이다. 이런 장면들이 나를
끌리게 하는 건, 아마도 어린 시절
그런 분위기를 통과해왔던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골의 어른들은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퉁명스런 가운데서 은근히 오가는
마음, 말 없이도 따뜻하게 소통되는 대화엔
아무 불편함도 없었다. 이 영화는 그걸
훌륭하게 복기해준다.
나는 아마추어답게 거칠게 말하련다.
이 영화는 한 운동화의 미시사(微視史)라고.
영화의 주인공은 알리와 자라, 두 남매이기도 하지만,
더 힘있게 부각된 주인공은 바로 헤지고 색이 바랜
낡은 운동화이다. 이 운동화 이미지를 구하고 싶었으나
나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힘있는 조연도
신발이다. 동생 자라의 분홍 구두. 이 신발의
'실종'이 이야기를 물고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운동화를 뚫어지게 바라보는데서 나온다.
검고 더러운 손이 뭔가를 꿰매는, 도입부의 장면은
리얼리티가 얼마나 강렬한 '은유'를 발산하는지를
보여준다. 동생의 구두 또한 닳고 헤져서
오빠는 그것을 수선하려 온다.

'천국의 아이들' 중의 한 장면


그 구두를 잃어버리는 상황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극적이다. 과일가게에서 소년은
구두를 판매대에다 올려두는데
쓰레기를 치우는 맹인이 와서 그 구두를
가져가 버린다. 눈먼 사람이라 그걸 쓰레기로
잘못 알았겠지만, 사실 그 구두는 이미
쓰레기와 다름 없이 낡은 것이었다.
이 영화의 미덕이랄까, 아니면 이란 사회의 공기같은 것이랄까
그런 걸 들자면,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문제는 다 감수하며 고개 숙여 받아들인다.
소녀의 구두가 실종되는 사건은 이 가난한 남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영화는 이 사건의 한 당사자를
비난하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그 맹인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을
한 것일 뿐이다. 관객 중 아무도 그 눈먼 사람을
원망하지 못한다. 하지만 알리는 이제 큰일이 났다.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그는 된통 혼찌검이 날 것이다.
그보다도 동생은 이제 뭘 신고 학교에 가나.
과일가게로 하릴없이 가서 뒤적거려 보지만
있을 리 없다. 관객은 알리의 심정이 되어
눈길로 함께 그 구두를 안타깝게 찾는다.
구두가 사라진 가게 진열대의 어둑한 구석구석
절로 눈이 팔린다.

이후 혼자 남은 오빠의 구두는
오전반 오후반 두 남매의
발을 모두 담아야할 수 밖에 없다.
수업을 마친 여동생이 허겁지겁 뛰어오면
오빠는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동생이 신고간
구두로 바꿔신고 학교로 뛰어간다.
알리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게 되는 이유는
3등 상품인 운동화를 타기 위해서였지만
그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할 수 있었던 건
동생과 신발을 바꿔신고 달려야 하는 필사적인
달리기에서 배양된 주력일 수도 있다.
영화는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고려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운동화는 나름의 곡절을 겪는다.
동생이 헐거운 운동화를 신고 도랑을 급히 뛰다
그만 한짝을 빠뜨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급류를 타고 저만치 달아나는 운동화.
아무리 급히 뛰어도 아장아장걸음일 수 밖에 없는
아이의 절박한 몸짓과 표정. 저게 어떤 운동화인데...
화면 안으로 뛰어들어가 주워주고 싶어질 무렵
운동화는 작은 터널 속으로 들어가 걸려버린다.
아이가 울먹이고 있을 때
아주 평화로운 표정의 어른 하나가 등장한다.
이 장면도 인상적이다. 어른은 아이를 진정시키면서
느릿한 동작으로 긴 막대기 하나를 가져온다.
터널 속에다 막대기를 넣어 운동화를 다시
흘러가게 한다. 그러나 감독은 저 어른이
호들갑스럽게 뛰어가 잡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 하나를 등장시켜 쉽게
그 신발을 쥐게 한다. 위기를 넘기는
지혜는 늘 이런 협조와 타협들에 있다.
어른들은 삶에 바쁘고 또 그 삶이 대체로 가난하여
표정들은 굳어지고 눈빛들은 무심해졌지만
그래도 이런 위기의 순간에 훌륭한 구원이 되어준다.
여기서 나는 그 두 사람의 이미지에서 문득
천사를 떠올린다.

'천국의 아이들' 중의 한 장면


오빠 운동화가 이렇게 바쁜 몸을 움직이고 있을 무렵
동생 자라의 구두 또한 살짝 얼굴을 내민다.
그 눈먼 넝마주이의 딸이 학교에
그 신발을 신고온 것이다. 학교 운동장에
줄을 선 소녀 자라는 아이들의 신발만 바라본다.
처음엔 물론 이쁘고 말짱한 구두를 신은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의 시선이다. 관객인 우리도 저 자라의 눈이 되어
아이들의 신발 하나 하나를 부럽게 바라본다.
나도 저런 거 신고 싶다. 그런 동경의 마음을
기억해내는 관객은 금방 소녀로 변한다.
그런데 그런 눈길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에 분홍 신발 하나가 보인다. 세상에...
자라가 신었던 그 신이 아닌가. 자라보다도 더 어린
소녀가 신고 있는 그 낡은 신. 그 신을 본 순간
나도 가슴이 뛰었다. 자라는 그 소녀를 눈여겨 봐뒀다.
나중에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 뒤를 밟는다.
뒤를 밟는 일도 살금살금이 아니다. 워낙 앞소녀가
천진하게 그리고 의심없이 뛰어가기에 뒷소녀도
조심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놀이를 하는
두 아이처럼 골목을 톡톡톡톡 뛰어간다.
마침내 그의 집. 문이 열리고 소녀는 들어간다.
뒷소녀는 한참을 지켜보다가 다시 오빠를 데려온다.
그런데 그때 그 문을 열고 나오는 맹인 넝마주이.
그리고 그 손을 붙잡아주는 어린 소녀.
그걸 바라보며 오누이는 신발을 찾는 걸 포기한다.
그들이 왜 포기했을까. 굳이 묻는 일이 우습지만
그건 싸구려 동정이 아니라, 신발의 쓰임새에 대해
나름으로 긍정한 까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지금 몹시 불편하지만, 저 아이에게서
저걸 빼앗아올 순 없다. 그 공존의 원리를
침묵으로 실천하는 아이들에게서 천사를 느끼는 건
어렵지 않다.

운동화들이 잠깐 사라지면서
액자같은 에피소드가 하나 끼어든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 쉬는 금요일날, 두 사람은
정원 청소부 일을 찾아 부자동네로 간다.
낡은 자전거에 의지한 두 사람의 일자리 구하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사나운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급히 도망을 치다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 아이는 아빠에게 대책을 요구하지만
아빤들 무슨 수가 있으랴? "꽉 잡아!"라고 말할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노인과 아이가 사는 집의
정원을 손질할 수 있게 된다. 이 일로
아빠는 꽤 많은 일당을 벌게 된다.
이 '액자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마지막에 살짝 비친 '희망적 낙천주의'를 위한
치밀한 연결이기도 하다.

영화를 가장 힘있게 부각시키는 대목은
역시 어린이 마라톤 장면이다.
일견 천의무봉과도 같이 자연스러워보이는
이 영화가 실은 얼마나 섬세한 '가봉'작업을 거쳤는지를
이 마라톤 에피소드는 짐작케 한다.
우선 출전 이유. 오빠 알리는 사실 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3등의 상품이 운동화라는 걸 보고
뛸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가 타려는 운동화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동생의 구두를
대신할 물건이다. 오직 그걸 타주기 위해
마라톤을 뛰겠다는 생각이다. 동생의 구두가 없어진 뒤
자신의 신발 하나로 서로 공유하며 살아야하는 불편을
생각한다면, 그게 꼭 동생 만을 위한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동생이 가족들에게 신발을 잃어버린 사실을
고자질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자신 때문에
공연히 불편을 겪어야 하는 일에 대한 미안함을
저 상품에의 집착으로 드러낸다.
그 다음, 마라톤과 신발의 어울림.
처음에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을 그 퇴색한 신발이라고
말했다. 신발은 소년의 발을 담고 뛰어간다.
잃어버린 신발을 찾기 위한 다른 신발의 숨차고 힘겨운
노동이기도 하다. 옆구리가 터질 듯한 그 신발은
그러나 쌩쌩하고 매끈한 신발들을 이기고,
그만 원하지도 않게 목적을 초과 달성해 버렸다.
그 다음, 고통이 키운 역량.
오빠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동생에게서 신발을 받아 신자 마자
죽어라고 뛰었다. 상품을 타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도 작용했겠지만,
그 골목길의 뜀박질이 효험을 봤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다음, 운동화가 1등 상품이 아니라는 점.
물질에 대한 욕망이란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들에게는 '필요한 만큼'만 필요할 뿐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필요한 만큼을 넘어선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감독은 그걸 말없이 말한다.
악착같이 1등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내게 꼭 필요한 자리에 있으려고 애를 쓰는 달리기는
그래서 이 영화에 흐르는 묘한 여유와 서정에 값한다.
저 3등의 운동화는 바로 이 시대의 과속과
과욕에 대한 적실한 제동이다. 소년은 결국
세상이 칭찬하지만 자신에게는 소용없는
1등을 해버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인다.

'천국의 아이들' 중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이제 할 말을 다 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가지 할 말을 더 남기고 있다.
하나는 아빠의 자전거에 실린 작은 박스 두개이다.
그 박스의 틈새로 보이는 건 분명 두 켤레의 운동화이다.
그러나 영화는 더 이상 이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냥 살짝 비춘 뒤 지나간다.
아이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운동화를
아빠는 정원일로 번 돈으로 아마도 사온 모양이다.
영화의 태엽을 돌아가게 하던 긴장은
이토록 완전하고 흐뭇하게 해결되었다.
아니, 해결되었을 거란 희미한 짐작만
영화는 남긴다. 여기엔 세상을 향해 빙긋 웃는
천사의 미소같은 뉘앙스가 있다. 얘들아, 고생했지.
속으로 겪은 아이들의 고통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아빠의 자전거는 집으로 돌아간다.
또 한 가지. 집 앞의 물탱크 앞에서
소년은 마라톤으로 부르튼 발을 드러낸다.
너덜너덜한 헝겊같은 운동화를 천천히 벗겨내자
신발의 헤진 부위 때문에 생겼을 상처들이
보인다. 물 속으로 발을 넣어
상처를 달래고 있을 때 붕어들이
다가와 살을 간질이는 모습은
길게 잔영으로 남는다. 소년의 마음을 알아주고
수고를 달래주고 싶은 관객의 마음이
저 붕어들의 지느러미에 매달린다.
시선은 따뜻하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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