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수를 세면서
길을 걷던 시절이 있었지
나무가 자(尺)여서,
삼천리 방방곡곡의 측량술이어서
심은 나무가 말라죽어도
시린 어느 집 장작개비로 뽑혀 나가도
나무와 나무 사이는 틀림없는 오 리
새 눈금이 그어져도,
눈금 하나가 지워져도
누가 뭐래도 오 리였지
오리나무는 오 리를 모르고
오 리를 모르면서도 여전히
오리나무이지만
나무로 길을 재던 시절은 이제 없지
오리나무들은 산에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지
그래도 오리나무와 오리나무 사이의
간격쯤이면 좋겠네
영 볼 수 없는 당신과 나 사이에도
오리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네
아무리 먼 길도 오 리면 된다고,
오 리면 오리라고
■오 리는 이 킬로미터쯤 된다. 어른 걸음으로 바쁘게 걸으면 삼십 분 정도 걸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다. 그런데 당신은, 그 구체적인 이유야 모르겠지만, "영 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무리 먼 길도 오 리면 된다고" "오 리면 오리라고" 가만히 속셈해 보는 심정은 처량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쓸쓸함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당신과 나는 이제 영영 만날 수 없지만,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내 마음속에다 오리나무를 하나 심고 또 심고 그러다 느티나무 하나도 어느 모퉁이에다 심고 팽나무도 한 그루 심어 두는 그 적적한 헤아림을 떠올려 보라. 그것은 어쩌면 뒤늦었으나 비로소 당신이 편히 쉴 그늘들을 내 안에다 차곡차곡 마련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 굳이 오시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여. 당신으로 인해 난 이미 푸르리니, 영원히 지지 않는 당신이여.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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