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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350권 돌파를 지켜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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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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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우석대 교수는 2009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번역에 있어 콘텐트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괴테의 사례를 든다. 괴테가 1825년 자택을 방문한 한 영국인에게 독일어의 우수성을 열정적으로 자랑하는 장면이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문학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 때문만 아니라, 이제 독일어를 잘 이해하기만 하면 다른 말을 많이 알지 못해도 되기 때문이지요. (중략) 그리스어나 라틴어,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의 경우 이들 나라의 최고 작품은 훌륭한 독일어 번역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그 말들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나라의 언어는 매우 유연합니다. 그 때문에 독일어 번역은 매우 충실하면서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이 있으면 시야가 매우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박 교수는 칼럼에서 “우리도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한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 자랑과 괴테의 독일어 자랑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한글의 ‘과학성’을 자랑하는데 괴테는 독일어의 ‘콘텐트’를 자랑한다. 과학성과 콘텐트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라고 묻는다. 물론 ‘답정너’다. 그가 보기에 “한글은 독일어의 원형인 로마 글자보다 무려 2000년 뒤에 창제된 글자다. 최신형 컴퓨터가 우수하듯이 최신형 문자가 과학적으로 우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탁월한 안목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빛난다.
“아무리 우수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담긴 ‘음식물’이 함량 미달이라면 허망하다. (중략) 우리가 한글보다 과학성에서 뒤떨어진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콘텐트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번역이 얼마든지 있어서 한글만 알아도 전 세계의 고급 지식을 얼마든지 섭렵할 수 있다고 자랑할 날이 우리에게는 언제 올까”

영어는 20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지만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이전만 해도 유럽의 변두리에서 사용하는 라틴 언어의 지독한 사투리였을 뿐이다. 영어의 극적인 지위 향상을 실감하게 해주는 사례가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 연구자 스탠리 웰스는 “셰익스피어의 출생 기록은 라틴어로 돼 있지만 사망 기록은 영어로 돼 있다”고 썼다. 셰익스피어는 뛰어난 영어 콘텐트의 생산자로서 영국과 영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현대 극작과 극예술의 어떤 영역도 셰익스피어가 이룩한 업적을 우회할 수 없을 것이다.

번역 작업은 한 언어권에 속한 집단이 신속하게 콘텐트를 확충하고 문화 수용 속도를 높이며 그 수준을 향상시키는 방법 중에 하나다. 서구화를 기반으로 한 일본 문화의 근대화 작업은 메이지시대 지식인들의 헌신적인 번역 사업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유럽의 르네상스조차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이루어진 이슬람 문헌의 번역을 통하여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역수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십자군 전쟁 이전 이슬람의 문화는 유럽을 압도했다. 박용진 서울대 교수가 2011년 5월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서기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학파의 저작들이 이슬람어로 번역됐다. 그리고 12세기까지 이슬람의 여러 학자가 이 저작들을 해석했다. 이러한 이슬람의 학문적 업적은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유럽에 유입됐다. 12세기 스페인의 톨레도가 중심이 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거의 모두 라틴어로 번역됐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거의 모든 지식 분야에서 학문적 진전이 이뤄졌다. 그러니까 유럽은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이슬람의 학문세계를 접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온전히 되살렸다. 이는 학문과 문화의 빠른 발전으로 이어졌다.

문화 영역에서, 특히 학문과 예술의 영역에서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식의 발전 속도가 빠르고 예술 감성과 기법이 방향과 층위를 가리지 않고 두려움 없는 도전을 거듭하는 지금 번역은 가장 안전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파이프 역할을 한다. 여기에는 고도의 지성이 개입하며 자의식이 작동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메이지 시대를 관통하는 서구문명 수용 역사에 있어 주목할 사례를 보여주었다. 바로 서구어의 번역이다. 일본이 서양 언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번역어가 일본의 근대 개념과 어휘의 뼈대가 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사회’ ‘개인’ ‘연애’ ‘근대’ ‘존재’와 같은 단어들은 이때 자리를 잡은 새로운 어휘들이다. 한국의 서구 문명 수용은 일본의 경험에 의해 걸러진, 다시 말해 일본에 의해 번역된 제2의 서구 문명을 이식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번역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글의 우수한 발음 체계를 이용해 원어를 그대로 표기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번역은 단지 등가(等價)의 언어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렇기에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번역한 임성모는 “번역은 단지 외국의 개념과 사상을 수용하는 지적 행위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 대화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는 문화적 실천”이라고 번역과 문화 정체성에 대한 탁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지금 ‘민음사’에서 낸 세계문학전집의 일련번호 350, ‘오 헨리 단편선’을 내려다보고 있다. 출간 20여 년 만에 이룩한 위업이 아닐 수 없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은 지금까지 1500만 부가 판매되었고 전체 8400쇄를 인쇄했다고 한다. 작품 수는 278종, 30개국 작가 175명의 작품을 번역가 165명이 번역하였다. 이 가운데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물여덟 명의 작품 일흔네 권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도합 50만3615부가 팔렸다.

민음사의 업적은 지난 1월 22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박맹호 회장의 뛰어난 안목과 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민음사를 창립해 이끌어온 박 회장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에 민음사를 세웠다. 서울 청진동 옥탑 방에서 오카 마사히로가 일본어로 번역한 인도 책 '요가'를 한글로 옮긴 것을 시작으로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이데아 총서', '세계 문학 전집' 등 5000종이 넘는 책을 펴냈다.

이 출판사는 문학을 꿈꾼 나의 청년 시절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지금도 나의 서재 한편을 민음사에서 낸 시집들이 압도하고 있다. 나는 원어와 번역을 나란히 실어 인쇄한 세계시인선을 통해 영미 모더니즘 시인과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외웠다. 오늘의 시인 총서에 이름을 올린 뛰어난 선배들을 본받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보면 나도 시인이 되어 언젠가는 그들처럼 시집을 출판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민음사에서 공들여 추린 시인들의 작품을 묶어낸 시집들은 지금도 안심하고 집어들 수 있다.

나는 대학교에 다닐 때 선배들이 일하는 여러 출판사에서 교정과 번역 등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책을 만들며 늙어가는 인생을 잠시 꿈꾸었다. 서울 관철동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 책 전문 출판사에 놀러가 3층에서 일하는 선배가 빨리 일과를 끝내기를 고대할 때 소나기가 쏟아져 황혼을 재촉하곤 했다. 그때 낡은 책상에 엎드려 어린이 책을 만들며 늙어가는 인생도 사뭇 거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요일 저녁, 기자들이 모두 퇴근한 편집국에 앉아 어언 350권에 이른 민음사의 전집, 오 헨리의 유명한 단편소설을 마트에서 시식을 하듯 이것저것 들춰본다. 뛰어난 출판인의 신념에 대해 묵상하고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향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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