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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와 야만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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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곳을 둘러보다 보면 섬찟 놀라 걸음을 멈추는 작품을 하나 만나게 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 ~ 1652)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다. 유대인 미망인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이기지 못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미모로 그를 유혹해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적진을 빠져 나와 동족을 구했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을 보면 유디트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왼손으로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잡은 채 칼을 쥔 오른손으로는 그의 목을 자르고 있다. 침대는 피로 흥건하지만 유디트의 표정에는 망설임이 없다. 오죽 했으면 이탈리아의 미술 평론가 로베르토 롱기가 이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을까. "혼자서 이런 그림을 그리다니 정말 무서운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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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를 소재로 여섯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그가 그린 유디트는 다른 화가들이 표현한 것과 달랐다. 남성 화가들은 유디트를 유혹과 욕망, 죽음을 잇는 관능적인 성의 대상으로 그렸다. 반면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배제한 강한 여성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아르테미시아의 개인사가 반영돼 있다. 그는 열여덟에 자신의 미술 선생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1612년 아홉 달 동안이나 로마 전역을 술렁이게 했던 '세기의 재판'이 벌어졌다. 가해자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아르테미시아를 음란한 여자로 매도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자신이 순결했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을 요구 받았다. 가해자에게는 유죄가 선고됐지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발표 당시 유디트의 얼굴은 아르테미시아를 닮고 홀로페르네스는 아고스티노 타시와 흡사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르테미시아가 겪은 사건은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이라 여겼던 400년 전에나 일어날 법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18일 5년 전 전남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 피의자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경찰은 두 번이나 사건 접수를 거부했다고 한다.
사건 당시 여고생이었던 피해자는 충격으로 신고를 못하다 지난해 뒤늦게 전남 지역 경찰에 신고했지만 시간이 지났다며 접수를 거부당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한 경찰서에 다시 신고하자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결국 2011년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해결한 도봉경찰서를 찾았고 추적 끝에 피의자들은 검거됐다. 성폭행 피해자가 사건을 접수해줄 경찰을 찾아 헤매게 한 사회. 아르테미시아가 유디트를 여전사로 그린 그 야만의 시대와 얼마나 다를까.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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