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가수 윤형주·시인 윤동주, 6촌 형제 '100년의 노래'

최종수정 2017.07.07 15:39 기사입력 2017.07.07 14:41

[깊이 읽기]탄생100주년 국민 애송시 '서시'의 시인과, 포크송의 전설가수의 '삶 속에 흐르는 DNA'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라일락꽃 향기를 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밤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비가 좋아 빗속을 거닐었고 눈이 좋아 눈길을 걸었소. 사람 없는 찻집에 마주 앉아 밤 늦도록 낙서도 했었소. 밤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테요.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최고의 미성 가수

가수 윤형주(70)가,남태평양 피지(Fiji) 원주민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우리들의 이야기'는 1970년대말과 80년대초 운동권 노래만큼이나 캠퍼스에서 많이 불렸던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 노래는 남성 4중창단 더 시커즈가 '이사레이(Isa Lei)'란 제목으로 새롭게 불러 히트를 했다. 헤어진 연인과 재회를 꿈꾸는 내용이다.윤형주는 이 노래를 번안했을 것이다.)

윤종신, 유영석, 박학기를 능가하는 최고의 미성(美聲) 가수로 손꼽히는 윤형주는, 이 노래의 가사를 썼다. 가사 속에 들어있는 청춘의 정취와 애상이 부드럽게 잔잔하게 흐르는 선율의 '살'이 되어, 노래 전체가 고뇌어린 생물체처럼 꿈틀거렸던 기억이 난다. '추억 돋는' 이 노래 하나만으로도 윤형주는, 한 시절 감수성의 촉촉한 전위(前衛)였다.



▶ 그 시인과 그 가수가 6촌이라는 사실의 의미

영화 '동주'(2015, 이준익감독)가 관객 100만을 넘기면서 시인 윤동주(1917-1945)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졌고, 70년대말 가수 윤형주가 그의 6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제 치하의 시인이 역사 속에만 들어앉은 인물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현재와 맞물려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윤형주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음달(8월)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기념 콘서트를 연다. 이 공연에서 윤형주는 스스로 작사 작곡한 추모곡 '윤동주님께 바치는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또 윤형주가 과거로 돌아가 윤동주시인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의 뮤지컬 '윤동주를 노래하다'를 초연한다.


▶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아버지

1970년대 윤형주는 '쎄시봉과 친구들'로 큰 인기를 누렸으며 광고음악 1400여곡을 써서 대중과 친숙한 음악인이다. 그는 1988년 중국 연길의 용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고, 서거 70주기인 2015년에 추모 리사이틀을 가지기도 했다.

윤형주의 아버지는 윤영춘 교수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당숙으로 시인이 죽기 2주전 마지막으로 면회를 갔고 일본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했을 때 시신을 수습한 분이기도 했다.

윤영춘은 이런 말을 했다. "사망한지 열흘 뒤 시체실로 동주를 찾아갔습니다. 일본 청년 간수 한 사람이 따라와 '아하,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운명했지요'라고 말하며 동정어린 표정을 지었지요." 윤동주 시인이 임종 때 내뱉은 외마디 소리가 무엇이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윤영춘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서울로 내려와 교사생활을 했으며 1948년 국학대학(이 대학은 1967년까지 존속하다가 현 우석대에 통합됐다) 교수가 된다. 동국대와 신흥대(현 경희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윤형주는 "아버지가 평생의 스승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 의사 아들을 갖고 싶은 부친과 음악에 미친 아들

윤영춘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재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몹시 바랐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연세대(연희전문학교의 후신) 의예과에 진학(1966년)한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형주는 의학보다 음악이 더 좋았다. 연세대 최초의 록 그룹 '피닉스'를 결성해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한다. 윤형주는 이 그룹에서 베이스 기타를 맡았다. 그 해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장희, 유종국과 함께 '라이너스'라는 포크 트리오를 만든다. 송창식과 함께 트윈폴리오를 만드는 것은 1967년 10월이다. 음악활동을 하느라 윤형주는 유급을 하게 되고 1968년 경희대 의대로 편입하게 된다.

당시 트윈폴리오의 인기는 놀라웠다. 방송 출연도 잦았고 오비스캐빈과 같은 업소 출연도 많았다. 경희대 의대에서도 수업일 수가 모자랐다. 의사 윤형주를 보려던 아버지 윤영춘이 몹시 화를 냈다. 1969년 크리스마스날 윤형주는 트윈폴리오 공연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듀오 해체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그는 학업에 열중하는 듯 했다.



▶ 방송DJ의 샛별로 떠오른 가수

1970년부터 라디오는 심야음악방송 전성시대였다. 동아방송(DBS)에선 최동욱 DJ의 '0시의 다이얼'이 대표 프로그램이었고 TBC에선 이종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인기몰이를 했다. TBC에서 최동욱을 진행자로 스카웃해 가버리자 DBS에선 비상이 걸렸다. 최동욱을 능가할만한 신선하고 강력한 후임자가 필요했다.

방송이 찾아낸 사람은 윤형주였다. 라디오국장이 윤형주 부친에게 전화를 해 통사정을 해서 결국 그는 방송DJ로 데뷔한다. 진행자로서의 그의 재능은 최동욱을 능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심야에 매일 생방송을 하는 DJ가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는 없었기에 1972년 은퇴를 한다.

그후 다시 의대 본과 3학년 학업에 열중하다가 1973년 홍대 미대출신 김보경과 결혼을 하게 되고, '미운 사람'(1974) '어제 내린 비'(1975, 영화주제가)가 대히트를 하면서 연예계 생활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기에 대학을 중퇴하는 사태를 맞는다.



▶ 한국CM송의 히트제조기가 된 남자

1975년 연말을 강타한 대마초사건으로 이종용, 이장희, 신중현과 함께 대마초 상습흡연자로 체포되었으나, 그는 다행히도 구치소에서 풀려난다.

이후 그는 CM송으로 명성을 날린다. 광고음악회사를 차린 지 2년 동안 내놓은 CM송이 200여 곡으로 당시 국내 CM송 전체의 60%를 차지했다, 1980년 접어들어 '바보'와 '사랑스런 그대'가 인기를 끌면서 화려하게 가요계로 복귀한다. 1981년에는 MBC FM의 '한밤의 데이트' 진행자로 기용된다.

▶ 모든 죽어가는 사랑해야지, 봉사의 시간

1994년 윤형주는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연합회에 뛰어든다. 집 없는 이들에게 둥지를 만들어주는 신앙사업으로 시작한 이 일은 그의 새로운 삶을 이끄는 계기가 됐다. 5월 윤형주는 한국해비타트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23년간 꾸준히 일을 해온 결과다. 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도, 해비타트 일을 하는 이유도, 윤동주의 시 한 구절에 모두 들어있다고 말한다. '서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윤동주의 시만은 노래로 못만든 까닭

윤형주는, 오래 전부터 윤동주의 시에 자신의 곡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고 싶은 꿈을 지녔었다. 그런데 부친 윤영춘교수는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시는 이미 노래야. 노래로 만들지 않아도 그의 시는 이미 노래야." 그런데, 윤동주의 '서시'는 조영남이 노래로 만들었다. 조영남이 만든 노래 또한 아름답지만, 윤형주에겐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대학엔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2015년 70주기 행사 땐 오야 미노루 도시샤대 총장은 추모연설을 했다.



▶ 일본인이 격찬한 한국 민족시인

“윤동주는 한국의 민족시인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시인이기도 합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으로 와서 도시샤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합니다. 그는 재학 중인 1943년 7월 14일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지요. 재판 결과,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하였습니다."

일본 지식인이 윤동주를 민족시인으로 지칭하고 한글로 시를 쓴 이유로 독립운동 혐의로 투옥되고 옥사했다는 사실을 담담히 시인하는 모습은 인상 깊다. 윤동주의 위대함은 저 식민압제의 당사자 국가 후손의 입 위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 한 시인이 걸어간 길, 그 시인을 노래하는 가수

시인 윤동주와 가수 윤형주는 가까운 친척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지만, 두 사람 모두 탁월한 한국어의 감수성과 한국적 서정의 개척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일제 식민지의 시인으로 살면서 고독과 고통을 시리도록 정결한 감성으로 응결시킨 시인은 올해 탄생 100주년에 이르기까지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을 더한다.



그 한국 언어의 정수를 기리며 콘서트를 여는 가수는, 가장 편안하면서도 매력적인 한국 대중감성으로 파고들어 현대사의 내면을 다채롭게 한 '대중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노년에 종교적 봉사로 삶을 더욱 가치있게 추스르는 모습 또한, 고결한 '동주'의 언어를 온몸으로 실천해가는 풍경이라 할 만하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던 그 마음으로...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오늘 본 뉴스

아시아경제 추천뉴스

리빙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