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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정이 만난 사람]物我一體의 순간 몸으로 그려낸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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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크로키' 세계 연 의수(義手)화가 석창우 화백

석창우 화백이 자신이 그린 수묵크로키 작품(위)과 성경필사본(아래)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문호남 수습기자)

석창우 화백이 자신이 그린 수묵크로키 작품(위)과 성경필사본(아래)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문호남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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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양팔에 '의수(義手)'를 낀 화가가 화선지에 거침없이 붓을 휘젓는다. 그의 붓 끝에서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경륜선수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살아난다. 일각을 다투는 선수의 긴장감이 오롯이 느껴진다. 탄력없고 뻣뻣했던 붓이 '물을 만난듯' 화선지 위에서 매끄럽게 춤을 춘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하나가 된다. 손(의수)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의수화가 석창우(63) 화백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피터팬' 후크선장 같은 쇠갈고리 손을 흔들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최근 그는 홍대 걷고싶은 거리 광장에서 현대무용가 홍선미씨와 컬래버레이션으로 그림과 몸짓이 하나되는 퍼포먼스를 마친 뒤였다. "퍼포먼스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립니다. 다리는 절뚝거리고, 목소리까지 변하니까요. 온몸의 기(氣)가 다 빨려 진공상태가 되지만,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죽는 순간이 온다면 퍼포먼스가 끝난 뒤였으면 좋겠어요."
주변에서는 "생명을 단축하는데 왜 하냐"며 만류할 때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찰나에 쏟아붓는 퍼포먼스가 신이 난다. 퍼포먼스 장소에서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무엇을 그릴지 즉흥적으로 결정한다고 했다. 장소와 사람, 분위기가 자신과 하나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순간 주변은 정적(靜寂)이 된다. '절정'의 분위기를 한 순간에 담기에, 퍼포먼스를 할 때 그린 그림은 '세상에 한 장 밖에 없는 그림'이 된다. 그는 언제든 '절정'을 담을 준비가 돼있다고 웃었다.

그의 말을 찬찬히 듣다 보니 그가 스스로 지었다는 호가 왜 성엣장인지 알게 됐다. '물위에 떠내려가는 얼음덩이'인 유빙(流氷)의 순우리말이다. 석 화백은 "빙산이 흘러다니다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어느 순간 물과 동화되는 과정이 재미있더라"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석창우 화백이 의수를 낀 채 그림을 그리는 모습. (사진=문호남 수습기자)

석창우 화백이 의수를 낀 채 그림을 그리는 모습. (사진=문호남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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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연'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가 화가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 화백은 "팔 있는 30년, 팔 없는 30년 중 다시 택하라면 망설임없이 팔 없는 30년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중소기업의 전기관리자이자 1남1녀를 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30살이던 1984년 10월, 2만29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했다. 27일동안 사경을 헤매고 중환자실에서 눈을 떠보니 양팔과 발가락 두 개가 절단된 뒤였다. 울고불고 할 줄 알았던 아내는 옆에서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빨리 낫기만 하라. 당신이 좋아하는 낚시도 하면서…."

주변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네살배기 아들은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졸랐다. 그는 의수에 볼펜을 끼워 아들이 내미는 노트에 참새를 그려줬다. 단 한번도 그림 공부를 해보지 않았지만 아들은 아빠의 그림에 '폴짝' 뛰었다. 아내와 처형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 공부를 권유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화실 문을 두드렸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물감을 많이 써야하는 직업인데 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물음이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군자는 먹만 하면 되겠더라"고 생각한 그는 처제의 소개로 서예가 여태명 스승을 만났다. 하루에 10시간 붓을 잡는 고행으로 코피를 쏟는 일이 허다했다. 말그대로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결국 동양의 먹과 붓으로 서양의 크로키를 그리는 수묵(서예) 크로키의 세계를 열었다.

먹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모든 색을 합치면 시커멓다. 먹 자체가 향이 있으면서 농담(濃淡)이 가능하다. 갈필 선을 한번 그을 때 시원하고 향이 뿜어나오면서 깊이감이 느껴지는 것이 늘 좋다"고 답했다. 그는 앞으로 전 세계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다. 또 성경 필사 작업을 2년 째 진행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석창우 서체(폰트)'도 고안중이다.

석 화백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말했다. "절망인 순간은 최악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앞으로 더 나빠질 일은 없다는 것이죠. 과거는 끝내고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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