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크로키' 세계 연 의수(義手)화가 석창우 화백
의수화가 석창우(63) 화백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피터팬' 후크선장 같은 쇠갈고리 손을 흔들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최근 그는 홍대 걷고싶은 거리 광장에서 현대무용가 홍선미씨와 컬래버레이션으로 그림과 몸짓이 하나되는 퍼포먼스를 마친 뒤였다. "퍼포먼스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립니다. 다리는 절뚝거리고, 목소리까지 변하니까요. 온몸의 기(氣)가 다 빨려 진공상태가 되지만,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죽는 순간이 온다면 퍼포먼스가 끝난 뒤였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을 찬찬히 듣다 보니 그가 스스로 지었다는 호가 왜 성엣장인지 알게 됐다. '물위에 떠내려가는 얼음덩이'인 유빙(流氷)의 순우리말이다. 석 화백은 "빙산이 흘러다니다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어느 순간 물과 동화되는 과정이 재미있더라"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주변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시절, 네살배기 아들은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 졸랐다. 그는 의수에 볼펜을 끼워 아들이 내미는 노트에 참새를 그려줬다. 단 한번도 그림 공부를 해보지 않았지만 아들은 아빠의 그림에 '폴짝' 뛰었다. 아내와 처형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 공부를 권유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화실 문을 두드렸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물감을 많이 써야하는 직업인데 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물음이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군자는 먹만 하면 되겠더라"고 생각한 그는 처제의 소개로 서예가 여태명 스승을 만났다. 하루에 10시간 붓을 잡는 고행으로 코피를 쏟는 일이 허다했다. 말그대로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결국 동양의 먹과 붓으로 서양의 크로키를 그리는 수묵(서예) 크로키의 세계를 열었다.
먹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모든 색을 합치면 시커멓다. 먹 자체가 향이 있으면서 농담(濃淡)이 가능하다. 갈필 선을 한번 그을 때 시원하고 향이 뿜어나오면서 깊이감이 느껴지는 것이 늘 좋다"고 답했다. 그는 앞으로 전 세계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다. 또 성경 필사 작업을 2년 째 진행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석창우 서체(폰트)'도 고안중이다.
석 화백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말했다. "절망인 순간은 최악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앞으로 더 나빠질 일은 없다는 것이죠. 과거는 끝내고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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