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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갑과 을 그리고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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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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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에 있는 봉갑사(鳳甲寺)를 찾았다. 이 절은 영광 불갑사, 해남 도갑사를 포함해 '호남삼갑'으로 불리길 원했다. '갑'은 '으뜸'과 '최초'라는 의미다. 불갑사(佛甲寺)는 백제 최초의 사찰이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384년 법성포에 도착해 지은 절이다. 도갑사(道甲寺)는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827~898) 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전국의 많은 절들이 도선과 인연이 있지만 그 가운데 국사의 고향으로 알려진 이 동네 절이 으뜸인 까닭에 '갑'자가 붙었을 것이다. 두 절은 지금도 사세가 만만찮고 관광지로 잘 알려진 사찰이지만 봉갑사는 그렇치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전에 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잊혀진 때문이다.

큰 폐사지 근처에는 오두막 같은 작은 절이 한 채씩 있기 마련이다. 절주인은 폐사지가 주는 허허로움이 좋아 잠깐 들렀다가 '필'이 꽃혀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절은 없어져도 그 명당터는 남기 마련이다. 커다란 고목에 매달린 작은 매미처럼 존재감은 없지만 그래도 '노 프라블럼'이다. 어차피 터가 좋아서 머무는 까닭에 볼품없는 집이 문제될 리 없다. 봉갑사 K스님은 15년 전에 이 자리로 왔다. 이름만 전하는 절터에 고찰의 흔적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저기 손보고 땀 흘린 덕분에 이제는 제법 규모를 갖춘 절이 됐다. 후발주자는 '따라하기'가 제일 쉬운 홍보방법이다. '호남삼갑 봉갑사'가 이 절의 카피였다.
하지만 '삼갑'이란 말조차 용납하지 않는 독보적인 '갑'을 명칭으로 삼은 절도 있다. 바로 충남 공주 계룡산의 '갑사'다. 갑 앞에 어떤 수식어도 거절한 채 '슈퍼갑'임을 만천하에 알린 갑사(甲寺)의 스님들은 힘이 엄청 셌다고 한다. "갑사에 가서 힘자랑하지 말라"는 지역속담이 전할 정도다.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기허영규 대사도 갑사 출신이다.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거의 승복을 입은 장군 모습이다.

'갑'절이 있으면 '을'절도 있을 터. 삼존불의 초기형태인 태안마애삼존불은 태을암(太乙庵)에 소재하고 있다. 울산의 은을암(隱乙庵)은 신라 박제상의 부인이 새(乙)가 되어 숨었다는 바위가 있다. 이처럼 '을'에는 갑을의 '을'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 사실 갑절도 사상ㆍ이념적 명칭에 불과할 뿐 갑을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천간(天干) 혹은 십간(十干)의 첫글자인 갑은 '제일'이라는 경외감까지 스며들었다. 옛사람들은 소중한 자녀들을 갑돌이, 갑순이로 불렀고 '아무개'를 '모갑(某甲)'으로 쓰던 시절도 있었다. 농경시대 큰부자를 의미하는 갑부(甲富)라는 말 속에는 수전노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웃에게 베푸는 착한 부자라는 뜻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제법 넓은 동네 개울에 시멘트 다리를 놓아야 했다. 인근 대도시로 나가서 나름 성공한 고향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쌀쌀맞게 거절당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모아 겨우 얼기설기 다리를 완성했다. 몇 년 후 성공한 고향사람 집안에서 부고를 냈다. 장례식을 마칠 무렵 동네청년들이 몰려나와 선산으로 가려는 운구를 이 다리에서 막았다. 전날의 허물을 진심으로 참회한 후에야 상주는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갑'의 지나친 행위로 '갑질'이란 부정적 표현이 널리 쓰인다. 하지만 갑과 을은 항상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갑이 을이 되기도, 을이 갑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이치다. 돌아오는 길에 봉갑사가 이름 그대로 삼남(三南)지역에서 곧 봉황처럼 훌륭한 갑절이 될 것이라는 덕담을 잊지 않았다.

원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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