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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일본의 '무쿠리 고쿠리' 도깨비는 어디에서 왔을까?

최종수정 2017.05.09 15:01 기사입력 2017.05.0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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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키섬의 '무쿠리 고쿠리' 인형(사진=이키시 관광상공과)

일본 이키섬의 '무쿠리 고쿠리' 인형(사진=이키시 관광상공과)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일본 규슈(九州) 북부에 위치한 이키(壹岐)섬에서는 예로부터 밤에 아이가 울며 떼를 쓰면 "무쿠리 고쿠리 도깨비가 와서 잡아간다"며 겁을 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쿠리 고쿠리' 형상을 했다는 인형 또한 아직 남아있다.

이 무쿠리 고쿠리 도깨비는 이키섬 뿐만 아니라 일본 서부지방 곳곳에서 전해지고 있는데 어원이 좀 특이하다. 무쿠리는 일본어로 몽골을 뜻하며 고쿠리는 고려를 의미하는 단어다. 한마디로 '몽골 고려 도깨비'가 우는 아이를 잡아간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바다건너 두 나라의 이름이 도깨비에 붙은 사연에는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외 침공을 받았던 전쟁인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란 전쟁사가 녹아들어가 있다. 여몽연합군은 1274년, 1281년 두 차례 일본원정을 펼쳤으며 두 차레 원정 모두 태풍에 휘말려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있다. 여기서 비롯된 또 하나의 신화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벌인 사상 최악의 작전으로 알려진 가미카제(神風) 신화다.

일본군과 교전 중인 여몽연합군(사진=위키피디아)

일본군과 교전 중인 여몽연합군(사진=위키피디아)


무쿠리 고쿠리가 도깨비 신화로 남고 그때 불어닥친 태풍이 일본을 지켜주는 신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당시 일본군이 그만큼 처참하게 패배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풍이 불지 않았다면 일본은 다른 유라시아 국가들처럼 몽골군에 짓밟혔을 가능성이 높다. 여몽연합군과 일본군의 교전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다.

먼저 첫 번째 원정 당시 1274년 몽골군 2만5000명과 고려군 1만4000여명으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은 쓰시마섬 남단의 사스우라와 이키섬에 당도해 일본의 병력을 철저하게 박살냈다. 단순 병력차 뿐만 아니라 전략, 무기 모든 면에서 여몽연합군은 일본군을 압도했다.
그때까지 국가가 만들어진 이후 단 한번도 대외 침략을 받아본적 없던 일본은 내전만 벌였었기 때문에 대륙의 새로운 전술이나 무기에 무지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장수가 한명씩 나와 일기토를 벌인 후 접근전에 돌입하는 구식 전술에 익숙했으며 여몽연합군과 같이 준비사격 이후 적군을 유인해 포위작전을 구사하는 새로운 전법에 무지했다.

말을 타고 돌진하는 사무라이를 활로 쏘는 여몽연합군(사진=위키피디아)

말을 타고 돌진하는 사무라이를 활로 쏘는 여몽연합군(사진=위키피디아)


이키섬의 사무라이들은 종래 자신들의 전쟁방식대로 무사 한명이 나가 자신의 이름부터 가문의 유래까지 한참을 읊은 후에 일기토를 청했다. 그러나 이런 전쟁방식은 일본 바깥에서는 흔히 삼국지 시대로 알려진 서기 2~3세기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춘 구시대적 전쟁방식이었고 여몽연합군은 이 모습을 오히려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여몽연합군은 사무라이들이 나와서 한참 족보를 외울 때마다 그대로 활로 쏴서 고슴도치를 만들었고 이후 벌어진 접전에서도 일본군은 중과부적이었다. 몇시간만에 일본군은 전멸했으며 이키섬을 정벌한 여몽연합군은 그대로 규슈 해안일대로 밀고들어가 상륙에 성공했다.

이에 규슈 지역을 총괄하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총사령관인 쇼니 쓰네스케는 규슈 병력을 모두 모아 1만7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여몽연합군에 맞섰고, 수도 교토에 상황을 보고하고자 파발을 띄웠다. 그러나 일본군은 여기서도 참패를 이어갔다. 김방경 장군의 지휘하에 있던 고려군이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대로 적군을 쓰러뜨리면서 일본군의 하카타만 일대 방어선은 전부 붕괴됐다.

해안가로 상륙중인 여몽연합군(사진=위키피디아)

해안가로 상륙중인 여몽연합군(사진=위키피디아)


결국 일본군은 퇴각해 당시 규슈 중심지역인 다자이후 일대에 모여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기적과 같은 대 폭풍이 몰아쳐 여몽연합군 군함 900척 중 200척이 가라앉았다. 결국 여몽연합군은 연전연승을 거둔 상황에서 태풍으로 인해 할 수 없이 고려로 돌아가고 말았다. 앞서 교토에 보낸 파발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야 도달했고 교토에서 더 멀리 떨어져있던 가마쿠라 막부는 상황이 종료되고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

1차 원정이 허무하게 끝난 후 2차 원정에서는 몽골 쪽에서 더 강력한 원정을 준비했다. 몽골군 1만명, 고려군 3만7000명으로 구성된 동로군과 중국 강남지역에서 편성한 강남군 10만명으로 완전히 일본 전역을 토벌할 대전력이 출진했다. 하지만 역시 갑작스럽게 불어온 태풍으로 인해 실패했다.

양측의 전력차는 병력 숫자나 새로운 전술전략, 무기체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여몽연합군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으며 좁은 일본 해안지대의 특성을 감안해 사무라이 기병대를 무력화시킬 도검병과 당시 일본에서는 존재조차 모르던 화포를 끌고 갔다. 태풍이 불지 않았으면 무쿠리 고쿠리는 단순히 아이들 울음을 그치는 도깨비로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 일본에서는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 원정 당시 규슈지역으로 태풍이 불어올 확률을 계산했는데 두 번 모두 1% 내외의 확률이었다고 한다. 괜히 신이 보낸 바람으로까지 치켜세운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디지털뉴스본부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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