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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개가 나타나는 순간/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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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가 전조등을 뿜으며 다가오기를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버스는 나를 태워 주고 나를 떨어뜨릴 텐데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들린다.
개가 튀어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꼬리까지 전부 드러날 텐데 개가 나타나는 순간
개는 산산조각 난다.

여기가 어디든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는 거야 저기가 어디든
저기를 빠져나가는 거야

  (중략)
잠시 후 나는 밖에 놓인다.
밖에 서 있다.
머리카락을 날리며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휘감고 돌아다니다가
천천히 놓아 준다.

천천히 네 발로 걷는
개는 산산조각 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하늘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둠
발을 잃은 어둠이 고른 숨을 쉬고 있다.

■그래, 그런 것도 같다. 내가 "길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버스가 내게 기다리라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내가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게 아니라, 버스가 "나를 태워 주고 나를 떨어뜨"리는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머리카락도 제가 "내 얼굴을 휘감고 돌아다니다가" "천천히 놓아" 주는 것 같고. "여기가 어디든 여기를 떠나/저기로 가는 거야 저기가 어디든/저기를 빠져나가는 거야", 그래서 이 문장들은 차라리 비명이라고 해야 맞겠다 싶다. 그런데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개는 산산조각 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하늘을/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둠". 참담하다. 저어기 마침내 나를 기다리게 한 버스가 오고 있다. 그래, 한 번은 타지 말자. 어쩌면 생이 통째로 바뀔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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