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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주말농장/고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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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용하기도 하지
 씨앗만 뿌려 놓으면
 어떻게 그렇게 닮은 것들이
 목을 빼고 고개를 쳐드는지
 시금치를 닮고 쑥갓을 닮고 옥수수를 닮은 것들로
 주말에나 가는 주말농장은
 주말이면 풀밭이 돼 있다

 땅에서 막 올라온 것들
 그 구분이 마냥 쉬울 수만은 없는데
 농장지기 '아먼 늙으먼 죽어야재 할매'는
 참 재주도 좋다
 나이 먹으니 아무것도 뵈는 게 없다더니
 눈은 손끝으로 옮겨 간 게지
 용케도 풀만 쏙쏙 뽑아내는데
 입도 쉬지 않고 놀리는 것인데
 끌끌 혀를 차며 젊은것들 어쩌고 하시는 데는
 내 뿌리까지 뽑히는 것만 같았지
 봄바람이 네 뿌리를 보여 달라고 할 때
 햇살은 혀를 내밀며 헤헤거리고
 막걸리 한 사발과 나는
 먼 산이나 바라보며 딴청이고


■고찬규 시인은 시를 참 재미나게 그것도 품격을 유지하면서 쓰는 몇 안 되는 시인들 중 하나다. 한마디로 위트를 아는 시인이고, 이 시도 그렇다. 이 시의 내용은 누구나 알 법한 것이다. 시인도 서울 근교에 허다한 주말농장들 중 하나에서 두서너 평을 분양받아 시금치니 쑥갓이니 옥수수 등속을 심었나 보다. 이름이 그러하듯 주말농장이야 주말에나 잠시 잠깐 내려가 호미질 몇 번 하고 놀다 오는 곳이니, 이게 시금친지 잡풀인지 뒤섞인 밭은 말 그대로 온통 풀밭이었을 테고. 그런데 농장지기 "아먼 늙으먼 죽어야재 할매"는 '용케도' 시인 대신 잡초들만 "쏙쏙 뽑아"낸다. 그 할머니, '손끝으로 눈이 옮겨 간' 듯 "참 재주도 좋다". 그 덕에 시인은 그저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면서 "먼 산이나 바라보며 딴청"인 것이고. 여느 시인이라면 저 농장지기 할머니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스스로를 좀 따끔하게 꾸짖거나 그랬겠지만, 고찬규 시인은 그러질 않는다. 아니 실은 이미 그런 일들을 슬쩍 해 버리고 짐짓 딴전이다. 벌써 다하지 않았는가. "아먼 늙으먼 죽어야재" 궁시렁궁시렁거리면서 수백 평의 주말농장을 일주일 내내 그렇게 평생 동안 아침저녁으로 돌보아 온 할머니를 생각해 보라. 그러고 보면 위트는 그저 말이나 글을 재치 있게 엮는 능력이 아니다. 그 심연엔 고통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니체)지 않는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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