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삼십 년 전에 발간된 시집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 적힌 "요즈음"은 아마도 1980년대 초중반일 것이다. 그러나 삼십 년 저편의 "요즈음"이 곧장 이편의 "요즈음"으로 읽히는 까닭은 왜일까. 물론 삼십 년이라는 세월을 건너 우리 사는 세상의 신산스러움을 온통 따뜻하게 끌어안고 있는 시인의 넉넉하고 다정한 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겨울이 지나 봄이 와도 "춥게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인데, 귀가하던 프랑스인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 잠들어 있는 노숙자를 잠시 보곤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길래 피디가 "불쌍해서 그러신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저 사람에게 담요를 나누어 주는 건 의무라서 그랬어요." 놀랍지 않은가. '연민'이나 '동정'이나 '배려'가 아니라, '의무'라니 말이다.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녕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채상우 시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