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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따뜻한 상징/정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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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밤에 혼자 깨어 있다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따뜻하게 그것보다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따뜻하게 그것만큼씩 춥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발이 시리기 때문에 깊게 잠들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꿈에도 소름이 조금씩 돋고 있는 것이 보이고 추운 혈관들도 보이고 그들의 부엌 항아리 속에서는 길어다 놓은 이 땅의 물들이 조금씩 살얼음이 잡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문전마다 쌀 두어 됫박쯤씩 말없이 남몰래 팔아다 놓으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밤을 건너가고 싶다 가장 따뜻한 상징, 하이얀 쌀 두어 됫박이 우리에겐 아직도 가장 따뜻한 상징이다


■이 시는 삼십 년 전에 발간된 시집에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 적힌 "요즈음"은 아마도 1980년대 초중반일 것이다. 그러나 삼십 년 저편의 "요즈음"이 곧장 이편의 "요즈음"으로 읽히는 까닭은 왜일까. 물론 삼십 년이라는 세월을 건너 우리 사는 세상의 신산스러움을 온통 따뜻하게 끌어안고 있는 시인의 넉넉하고 다정한 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겨울이 지나 봄이 와도 "춥게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인데, 귀가하던 프랑스인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 잠들어 있는 노숙자를 잠시 보곤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길래 피디가 "불쌍해서 그러신 건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저 사람에게 담요를 나누어 주는 건 의무라서 그랬어요." 놀랍지 않은가. '연민'이나 '동정'이나 '배려'가 아니라, '의무'라니 말이다.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녕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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