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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분홍 구루푸/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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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앞머리에 매달린 구루푸 대롱대롱 되똑하네 소녀들 연신 깔깔대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터져 나오는 분홍 웃음소리 굴러가는 유리구슬 부딪듯 쟁쟁 울리네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 겹쳐 입고 제주 가는 여객 터미널, 줄지어 서서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빙그레 웃거나 말거나, 소녀들 분홍이네 배에서 내릴 무렵이면 툭 튀어나온 이마 위에 동그랗게 말린 앞머리 동그마니 매달리겠네 분홍 구루푸 돌돌 말아 올린 저 희디흰 시간, 어떤 깊은 소용돌이도 저 어여쁜 분홍 가리지 못하리

[오후 한詩] 분홍 구루푸/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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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일단 시는 시에 적힌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온통 은유나 환유로 짜인 시도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전이나 그 너머를 따지지 말고 우선은 마치 회화의 선과 면과 색을 하나하나 눈에 담듯 단어 하나 어절 하나를 축자적으로 마지막까지 차곡차곡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렇게 읽고 싶지가 않다. 막무가내 치밀어 오르는 게 있어서다. 아니 실은 그보다 먼저 탄핵 선고일 아침 출근길에 찍힌 이정미 헌법 재판관의 머리에 꽂혀 있던 "분홍 구루푸"가 생각나서였다. 참고로 이 시는 3월 10일 이전에 발간된 모 계간지에 실린 시다. 그러니 이 시에 적힌 "분홍 구루푸"를 두고 '탄핵' 운운하는 건 지극히 잘못된 읽기다. 이 시는 다만 수학여행에 들뜬 여학생들의 "어여쁜" 생기발랄함을 떠올리고 흐뭇해하는 것으로 읽기를 그쳐야 하는 게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더 북받쳐 오른다. 앞머리에 "분홍 구루푸"를 돌돌 말고 깔깔거렸을 단원고의 "소녀들"이 떠올라서. 그리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늘하다. 이정미 재판관의 "분홍 구루푸"가 비록 당장 법으로는 제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국가의 수장이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끝내 지켰어야 할 성실의 증표 같아서. 그리고 그래서 더 맺힌다. 그날 이후 근 삼 년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어떤 깊은 소용돌이도 저 어여쁜 분홍 가리지 못"할 것이기에, 그래서 차마 시 읽기를 여밀 수가 없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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