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봉한 일본 하라다 마사토 (原田眞人) 감독의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은 1945년 8월 15일 항복하기 전 며칠간의 천황과 군부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재현한 것으로 호평 받은 작품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제국주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아베(安倍晋三)정권이 노리는 '일본의 보통 국가화', 즉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자는 우익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
숨은 의도는 불순할지라도 주인공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야쿠쇼 코지 역)는 기억할 만하다. 8월 15일 새벽, 포츠담 선언 최종수락 직전 그는 육군상 관저에서 전통 사무라이 식으로 할복(割腹)했다. 영화에는 좀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위해 할복 바로 전 사케를 담담히 마시는 장면, 할복의 고통스런 시간을 줄이기 위한 카이샤쿠(介錯: 뒤에서 목을 쳐주는 것)를 단호히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패전의 새벽, 극심한 고통을 겪다 아나미는 숨을 거두었는데 "한 번 죽음으로 대죄를 씻고… 신주(神州, 일본)는 멸망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는 유서가 유명하다. 그의 할복으로 항복을 저지하려 8월 14일 밤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 미야기 사건(宮城事件)은 미수로 끝났다.
1945년 일본 보수가 배를 가르는 고통으로 패전의 무거운 책임을 졌다면 2017년 '최순실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을 대하는 한국 보수의 모습은 희극을 넘어 개그를 연상하게 한다.
서너 명 당원권 정지로 "청산 끝!"을 외치는 새누리당(자유한국당), 당명ㆍ로고를 '자유한국당'으로 바꾸면 3년 후 총선에선 민심도 다시 돌아오리란 안이함의 극치, 화동(花童) 대신 반기문 전 총장의 집 앞에 꽃 들고 나타난 4선 의원, 박사모 태극기 집회에 얼굴 내미는 민중당 출신 전직 지자체장과 대통령을 누나라고 부르던 국회의원… 탄핵이란 엄중한 현실에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각자도생의 잔망스런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올 때까지 그들에게서 의원직 사퇴나 정치은퇴와 같은 무거운 처신을 들어본 적 없다. 일본 보수가 패전의 새벽 보여준 비장함도 기대하긴 난망이다.
할복한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의 차남은 태평양 전쟁 중 소위로 복무하다 아버지보다 먼저 전사했다. 국가안보? 그렇게 소중하다면 군 면제자를 또 대선에 내보내는 치졸한 생각도 내려놔야 한다.
강병호 배재대학교 한류문화산업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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