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은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어슴푸레하고 축축한 곳에서 야옹야옹 울고 있던 일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이 몸은 여기서 처음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봤다. 게다가 이후에 듣자니 그것은 서생이라고 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영악한 종족이었다고 한다. 이 서생이라고 하는 것은 때때로 우리를 잡아 삶아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별반 무섭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바닥에 태워져 쑤욱 들어 올려질 때 왠지 둥둥 뜬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뿐이다. 손바닥 위에서 조금 안정되어 서생의 얼굴을 본 것이 이른바 인간이라는 존재를 처음 본 것이리라. 이때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느낌이 지금이 되어서도 남아 있다….’(민병훈 번역)
누가 번역하든 소세키 소설의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옮긴이는 표기를 하는 데 몇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소세키를 ‘나쯔메 소오세끼’라고 표기하였다. 원어 발음과 가깝게 표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본다. 물론 이렇게 써도 일본어의 소리값을 온전히 받아 적었다고 보기 어렵다. 나쯔메의 ‘쯔’는 사실 훈민정음에 있는 반치음에 가까운 소리, 쓰와 쯔의 사이에 낀 그런 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옮긴이의 노력이 지향점을 어디에 두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을 미국농구 해설가 한창도는 굳이 ‘마이클 졸던’으로 읽었는데, 나는 그가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설의 제목을 아예 확 바꾸어버렸다. ‘이 몸은 고양이야’.
동양의 언어를 라틴계 언어로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반대도 물론 어렵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지식 정보 외에도 지식언어를 번역해내기 위해 악전고투했다. ‘사회(社會)’, ‘개인(個人)’, ‘자연(自然)’ 등은 모두 그때 번역되어 일본은 물론 한국과 중국, 대만 등에서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야나부 아키라(柳父章)가 쓴 ‘번역어 성립사정’은 그 고투의 기록이다. ‘吾輩は猫である’는 영어로 번역할 경우 ‘I am a cat’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본어 ‘吾輩は猫である’는 그렇게 멋없고 건조한 말이 아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은 그래서 매우 훌륭하다. 익숙해진 정보에 반하는 새 정보가 강력하게 제시되면 약간 거부감을 초래할 수 있다. 나는 ‘이 몸은 고양이야’라는 제목이 거북했다. 번역자나 출판사에서 뭔가 새롭게 보이거나 의미를 부여한 듯이 보이고 싶어서 ‘오버’를 했나 싶기도 했다. <희랍인 조르바>를 <그리스인 조르바>로 바꿀 때와는 경우가 다르니까.
문장에 대한 선호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선고를 할 권리가 없다. 책에 대해 글을 쓰면서 굳이 이름이 들어간 문패를 넣는 이유는 글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선언적 언어를 사용할 만한 내공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틀릴 위험이 늘 있다. 그러니 내가 다루는 책에 대한 글이 혹여 뭉그러지더라도 책이나 지은이, 옮긴이의 허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름을 문패로 걸면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니, 틀렸다면 비판받아야 할 사람도 분명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이 몸은 고양이야’는 낯선 책이다. 낯섦을 원했다면 기획자의 승리다. 그러나 나는 기왕에 나온 책, 소오세끼가 아니라 소세키가 쓴 책이 읽기 편하다. 고양이가 자신을 ‘이 몸’이 아니라 ‘나’라고 표현한 옛 소설이 읽기 좋다. 다만 이 소설의 감미로운 대목에서 열어 보이는 정서의 세계는 새 번역이 훨씬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한 부분을 지나갈 때는 마치 하이쿠를 읽는 기분이 든다. 띠지부터가 그렇다.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서글픈 소리가 나지.”
<나쓰메 소세키 지음/서은혜 옮김/창비/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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