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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5] 아우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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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누님께서 여기 누워 계신 줄만 알았습니다. 초행도 아닌데, 이곳 사적지의 묘(墓)가 빈 무덤인 것을 몰랐습니다. 초혼묘(招魂墓). 혼백만 불러 모신 자리.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묘비 아래 안의사가 계시지 않은 것처럼, 당신의 유택(幽宅)에도 당신이 없습니다.

1920년, 누님의 분하고 기막힌 주검은 이화학당의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요. 야만의 시대는 무덤 하나도 가만히 놓아두질 않았습니다. 무덤은 파괴되고 시신조차 찾을 길 없게 되었지요. 짐승의 시간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쓰레기장에 묻은 자들의 세월 아닙니까.
누님의 혼령(魂靈)만은 분명 여기 계시리라 믿습니다. 고개 하나 넘으면 누님의 생가, 한 굽이만 돌면 부모님 잠드신 곳 아닙니까. 총탄에 쓰러진 형님을 업고 뛰며 필사적으로 저항한 당신 숙부의 산소도 근처입니다. 무엇보다, 그날 스러진 '아우내'의 원혼들이 모여 있는 이 언덕을 당신 아니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추모각 앞마당에 봄 햇살이 가득 내려앉았습니다. 꽃나무들이 기미년 그날처럼 일제히 소리치며 일어설 태세입니다. 겨우내 비축해놓은 힘을 일순간에 다 쏟고 터뜨릴 것처럼 기를 쓰고 있습니다. 달리기 출발선에서 선생님의 호루라기 신호를 기다리는 여학생들을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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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 봄꽃들은 아마도 누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풀꽃들도 강소천 선생의 노랫말에 나오는 얼굴을 찾고 있을지 모릅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누님은 삼월의 연인입니다. 이땅의 사람들이 백년을 '누나'라 부르고 따르며 사랑해온 이름입니다.
세 살짜리 꼬마도, 팔십 노인도 당신을 '누나'라 불러왔습니다. 성별이나 나이와는 무관한 호칭일 것입니다. '헌법 전문(前文)'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3ㆍ1'이라는 단어에는 누님 얼굴이 들어있습니다.

목숨을 걸었던 열일곱 살 봄날에 그리고 숨이 지던 열여덟 살 가을날에, 당신은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었지요. 오늘 이곳엔 더 많은 누님들이 보입니다. 당신의 생가 옆 담장에 낯익은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유관순 기념교회 입구엔 슬픈 사연이 내걸렸습니다. 위안부 소녀들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소녀들에게 참 많은 빚을 졌습니다. 아니, 그들에게 할 말이 없는 나라입니다. 무덤도 청춘도 지켜주지 못했으니까요. 해준 것은 별로 없는데 주문과 요구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녀들의 아픔과 슬픔은 나라를 찾고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지요.

전쟁과 가난, 성차별의 질곡 속에서 대부분의 언니 누나들은 콩쥐나 '몽실 언니'가 되어야 했습니다. 가장의 역할을 떠안기도 하고, 부모 대신 노동과 희생의 굴레를 쓰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나 마치면 다행이었지요. 상급학교는 언감생심. 서울행 기차를 타거나 대처로 떠나야 했습니다.

구로공단,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갔습니다. 버스 안내양이 되고 식모가 되었습니다. '공순이', '차순이', '식순이'가 되었습니다. 졸면서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있는 힘껏 버스에 매달렸습니다. 눈물이 절반인 밥을 먹었습니다. 어린 동생을 위해 봄날을 바쳤습니다. 공부하는 오빠를 위해 제 꿈은 버렸습니다.

가슴 설레는 나이였지만, 그네를 뛰러갈 시간 따위는 없었습니다. '사랑가'를 부를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굳이 견주자면 춘향이보다는 심청이에 가까웠습니다. 끼니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치마저고리에 흙과 먼지와 비린내와 기름때를 묻혀야 했습니다. 물불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아닌 사람을 위해 썼습니다. 가족을 위해 청춘을 헐값에 내다팔았습니다. 나라를 위해 소녀시대를 바쳤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 자리가 있다면 누나들의 의자를 단상 높이에 두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날엔 무척 많은 훈장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위안부 '소녀상'을 생각합니다. 세우려는 사람들과 철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실랑이가 딱해 보입니다. 건립의 명분과 의미를 공감하는 일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 상(像)에는 그 소녀들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그늘에서 희생된 모든 소녀들이 이 안에 있다.'

거기 이렇게 새기고 싶습니다. "이 조각에서, 일제에 희생된 소녀들과 억압과 차별에 가여운 삶을 살았던 모든 소녀의 얼굴을 보자. 복된 나라 평화로운 시대에 나지 못한 소녀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생각하자. 이 소녀는 우리 할머니다. 어머니다. 고모다, 이모다. 영원한 누이들이다."

뜬금없이 변영주 감독의 영화 제목이 떠오릅니다.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엊그제가 '세계여성의 날'이었기 때문일까요. 공연히 비슷한 질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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