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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태와 영자' 연일 매진되던 2월, 충무로 술집서 취중에 간 천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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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 - 시대와 불화 거듭하다 숨진, 유학파 히피 하길종의 영화같은 삶


천재라는 수식만으로 하길종의 일생을 표현하기엔 그가 부딪혀온 삶의 여정은 반항과 투쟁의 역사였다.

천재라는 수식만으로 하길종의 일생을 표현하기엔 그가 부딪혀온 삶의 여정은 반항과 투쟁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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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치렁하게 내려오는 장발 머리,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전도유망한 히피 감독은 공항에서 곧장 정보부로 압송돼 영문 모를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학부 시절 절친한 지기들은 반정부적 성향으로 수배 중이거나 이미 붙들려와 감옥에 있었다. 동학군의 태인 전투를 소재로 미국서 작업해 온 시나리오는 촬영은 고사하고 제작부터 난망할 지경. 그는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군대로 들어가 때를 기다렸다. 요절한 영화감독, 하길종의 얘기다.

하길종이 처음으로 '흥행'을 통해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었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속에는 혁명과 정변을 겪어낸 자신이 바로 뒷 세대인 70년대 청춘들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우울한 시선이 담겨있다. 사진 = 영화 '바보들의 행진' 스틸 컷

하길종이 처음으로 '흥행'을 통해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었던 영화 '바보들의 행진' 속에는 혁명과 정변을 겪어낸 자신이 바로 뒷 세대인 70년대 청춘들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우울한 시선이 담겨있다. 사진 = 영화 '바보들의 행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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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홀로 남은 소년
8살에 어머니를, 10살엔 아버지마저 잃고 우울감에 젖어 일찍이 공부를 작파한 소년은 교과서보다 시집을 더 가까이했음에도 늘 준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입시가 닥쳐오자 3개월간 학교가 아닌 집 냉방에서 독학에 매진한 끝에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캠퍼스의 낭만은커녕 입학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3.15 부정선거가 터져 공부보다 데모로 청춘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 쏟아지는 선언문과 돌멩이를 함께 쥐어 든 현장에서 자신과 같은 독불장군 친구들인 김승옥, 김현, 이청준, 김광규, 그리고 고교동창 김지하와 어울려 4월의 승리를 맛봤고, 5월 쿠데타로 이내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다. 비루한 현실에 눈을 감자 펼쳐진 초현실주의 세계에 심취한 그는 랭보와 말라르메를 탐닉하며 스스로 시인을 자처했지만, 그 모든 행보는 그의 시집 제목과 같이 ‘태(胎)를 위한 과거 분사’에 불과했다. 문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그는 영화로 관심을 옮겨 졸업과 동시에 국내 최고의 영화사 신필름에 입사하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다.

하길종의 UCLA 대학원 졸업작품 '병사의 제전'은 동양에서 온 유학생이 미국사회에서 겪은 다양한 감정과 그의 예술적 자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당시 MGM영화사가 수여하는 메이어 그랜드 상을 수상할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사진 = 영화 '병사의 제전' 스틸 컷

하길종의 UCLA 대학원 졸업작품 '병사의 제전'은 동양에서 온 유학생이 미국사회에서 겪은 다양한 감정과 그의 예술적 자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당시 MGM영화사가 수여하는 메이어 그랜드 상을 수상할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사진 = 영화 '병사의 제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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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닦이, 그리고 나체의 남녀

신필름 막내 생활은 그에게 영화공부가 아닌 심부름과 잡일을 떠안겼다. 일을 접은 그는 전공을 살려 에어프랑스에 입사, 미국 비자를 받아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막대한 등록금을 감당할 재원이 여의치 않자 극한직업에 뛰어들었다. 접시를 나르고,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다 시체를 닦는 일도 마다치 않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아트에 들어가 사진과 미술을 공부한 뒤 UCLA 영화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미국 영화계를 이끈 할리우드 7세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의 동기였고, 후배 중엔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카스도 있었다. 쟁쟁한 영화 천재들 사이에서, 또 사이키델릭과 히피문화, 반전운동과 블랙파워가 뒤섞인 공간에서 그는 시(詩)에서 드러낸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영상에 옮기는 데 매진했다.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병사가 관을 끌며 해변을 걷고, 나체의 남녀가 전사자들이 잠든 묘지를 뛰어다니며, 인디언 무당이 굿판을 펼치는 독특한 졸업 영화 ‘병사의 제전’으로 미 전역의 영화학도 중 가장 우수한 학생 4명을 선정하는 MGM사 메이어그랜드 상을 수상, 학교로부터 강사직을 제안받지만, 일거에 거절하고 한국행을 결심한다. 공직에 몸담고 있던 형님이 승진을 앞두고 군 미필에 학생운동 전력이 있던 자신으로 인해 낙마했단 소식을 접한 뒤였다.
당대 인기작가 최인호가 그려낸 병태와 영자의 캠퍼스 낭만백서는 하길종의 손을 거쳐 유쾌하지만 어딘지 모를 시대의 우울감을 담아낸 영화 '바보들의 행진'으로 거듭나 1975년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됐다. 사진 = 영화 '바보들의 행진' 스틸 컷

당대 인기작가 최인호가 그려낸 병태와 영자의 캠퍼스 낭만백서는 하길종의 손을 거쳐 유쾌하지만 어딘지 모를 시대의 우울감을 담아낸 영화 '바보들의 행진'으로 거듭나 1975년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됐다. 사진 = 영화 '바보들의 행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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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했던 영화 바보

늦깎이 군 생활을 마친 하길종은 이효석의 소설 ‘화분’을 각색해 청와대와 파시즘 정권을 비트는 우화를 영화로 만들지만, 흥행실패와 함께 파졸리니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테오레마’ 표절 논란에 휘말려 호된 충무로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삼국시대 전장을 배경으로 민중의 삶을 그리고자 했던 영화 ‘수절’ 또한 민담보다는 복수에 젖은 무협서사에 가까워 관객과 평단의 외면을 받자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다. 당대 최고 인기 작가 최인호의 신문 연재 꽁트 ‘바보들의 행진’ 연출을 맡은 그는 원작이 가진 가볍고 유쾌한 청춘 군상의 표정에 엄혹한 시절의 우울함을 입히고 고래를 찾아 동해바다 절벽에서 허공에 질주하는 청년의 자조를 보태 시대를 대변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냉소했고, 이 불온한 기운을 감지한 검열관들은 그 풍경에 가차 없는 가위질로 응수했다. 잘린 필름을 몰래 이어 붙여 첫 상영을 마친 그는 곧장 남산에 끌려가 이유 없는 반항의 저의를 해명해야 했고, 비로소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그는 화장실 변기 앞에서 바지를 까내리고 영화를 씹어대는 관객의 촌평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세상이 원하는 이야기 사이에서 늘 갈등했고 고뇌했다. 이내 높았던 기대에 못미치는 그의 작품을 향해 쏟아지는 세상의 비난에 그는 자신의 책에서 담담하게 토로했다. "나에게 왜 좋은 영화를 못 만드느냐고 묻지는 말아주십시오. 나는, 아니 우리 모두가 이렇게 지탱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니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세상이 원하는 이야기 사이에서 늘 갈등했고 고뇌했다. 이내 높았던 기대에 못미치는 그의 작품을 향해 쏟아지는 세상의 비난에 그는 자신의 책에서 담담하게 토로했다. "나에게 왜 좋은 영화를 못 만드느냐고 묻지는 말아주십시오. 나는, 아니 우리 모두가 이렇게 지탱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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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자를 찾습니다’와 ‘한네의 승천’을 통해 실험적 영상에 대한 시도를 거듭한 그는 지속가능한 영화작업을 위해 현실 속 이야기에서 슬픔(‘속 별들의 고향’)과 기쁨(‘병태와 영자’)을 찾아 나갔다. 하길종은 미처 필름에 담지 못한 열정을 동시대 영화에 대한 냉철한 비평으로 쏟아냈는데, 연출력과 별개로 비평가로서 그의 안목은 고고하고 강직해 호평보다는 혹평이 줄을 이은 탓에 분노한 영화계 동료들의 주먹다짐에 입가에 핏물을 머금고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술자리에선 거침없이 대통령을 거명하고 독설을 일삼아 만석의 술집에 없는 자리도 만들어내는 배포가 있었고, 할리우드에서 승승장구하는 동문들의 영화 원작(‘죠스’, ‘스타워즈’)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는 작업을 이어나가는 한편 강단에서 후학양성에도 매진하며 전천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시대와의 불화는 한 로맨티스트의 예민함을 곧 불구상태의 열패감으로 바꿔놓았고, 마지막 영화 ‘병태와 영자’가 연일 만원사례를 거듭하던 2월의 마지막 날 충무로의 어느 술집에서 쓰러진 그는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 스토리를 한 천재가 남긴 신화로 치부하기엔, 현실의 그가 영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독히도 깨지고 부서지며 체감한 엄혹한 현실은 곱씹을수록 아프고 쓰라린 시절의 흔적으로. 그의 마지막 영화가 걸렸던 극장 터에 서서, 고인의 38주기를 기린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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