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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2016년 11월 12일 저녁 플라자호텔 앞/김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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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처럼 새까만 얼굴 팥알 눈 하나가 거대한 촛불 행렬을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운동화와 때에 전 바지 사이로 삐져나온 맨발의 발목은 각목처럼 야위었다. 붉은 노끈으로 묶은 배낭에 걸레 같은 이불을 돌돌 말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함께 묶인 냄비가 반질거렸다. 촛불 행렬이 다 지나갈 때까지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사내가 대형 스피커에서 하야가(下野歌)가 흘러나오자 몸을 조금씩 앞뒤로 움직였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구속하라 구속하라 구속하라, 함성이 광장을 흔들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던 사내는 남이 보이지 않게 살짝 주먹을 쥐고는 시위대의 후창에 맞추어 세 번 주먹을 소매 아래로 내뻗었다. 분노한 시민들의 함성을 따라 사내는 계속 가만가만 미세하게 주먹을 내뻗고 있었다. 노숙자였다.


■사실을 먼저 적자면 이 시를 읽고 나서 처음엔 좀 헛헛했다. "분노한 시민들"과 그들의 "후창에 맞추어" "가만가만 미세하게 주먹을 내뻗고 있"는 노숙자 사이에 아무래도 약간의 간극이 있는 듯해서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라고 해서 혹은 우리라고 해서 '노숙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시민(citizen)'이라는 용어는 근대 이후 국민국가의 확립과 그 체제의 공고화에 따라 '국민(nation)'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노숙자'는 사실 국가로부터 배제된 자이지 시민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민주주의적 자치를 기본으로 삼는 정치 공동체의 엄연한 일원이며 그 권리를 완전하고도 평등하게 보장받는 구성원 즉 시민이다. 다만 갈수록 강화되는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화와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자신의 기반으로 재전유한 국가로부터 버림받았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감하게 말하자면 우리 또한 국가 안의 노숙자들인 셈이다. 그러니 저 광장을 흔들고 있는 함성은 국가의 그 어떤 권력이나 그 어떤 법보다도 앞서고 또한 그래야 한다.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저버린 국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이 시를 읽기 전까지 나는 노숙자였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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