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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핵소 고지'는 생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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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 감독의 '핵소 고지', 1945년 태평양전쟁 총·칼 없이 75명 목숨 구한 기적같은 의무병의 실화
영화보다 참혹했던 실상 민간인 사망자 9만4000명…조선인도 1만명 달해

영화 '핵소 고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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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핵소 고지'는 태평양전쟁의 참상을 전한다. 1945년 5월 일본 오키나와 마에다 고지. 총·칼 한 자루 없이 일흔다섯 명의 목숨을 구한 데스몬드 도스(1919~2006)의 실화다. 그는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신자라서 집총을 거부했다. 멜 깁슨 감독(61)은 종교적 신념 정도로 소개한다. 아버지의 학대를 계기로 설정한다. 1차 대전 참전으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매사 폭력적이다. 실제 도스의 아버지는 평범한 목수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에 주목해 배경을 달리 했을 것이다. 전투 시퀀스는 피비린내가 날 만큼 잔인하다. 컴퓨터그래픽을 거의 쓰지 않아 야성적 질감이 극대화됐다. 그런데 실제 전투는 이보다 훨씬 참혹했다.

철의 폭풍
함대 1500척을 앞세운 미군은 무자비했다. 1945년 3월26일부터 3개월 간 포탄 217만발을 퍼부었다. 주민 한 사람당 50발이 넘는 '철의 폭풍(TYPHOON OF STEEL)'은 섬의 지형까지 바꿔놓았다. 일본 32군 부대가 미군의 본토 상륙을 늦추기 위해 지구전을 편 결과다.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아두려고 가카즈 고지에서 마에다 고지까지 이어진 구릉지에 지하 진지를 구축했다. 미군은 오키나와에 무혈 상륙했지만 이 곳을 돌파하는데 50일이 걸렸다.

오키나와에 무혈 상륙한 미군

오키나와에 무혈 상륙한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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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폭풍이 개시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오키나와를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전초기지로 보았기에 32군 부대를 괴멸시켜야 했다. 민간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군은 오키나와전을 대비해 1944년 10월10일 나하 시에 공중 폭격을 했다. 항만, 도로, 촌락 등을 겨냥한 공격에 나하시는 90% 이상 파괴됐고, 668명이 사망했다. 그해 8월22일에는 본토로 피신하던 민간인을 실은 츠시마마루호를 어뢰로 침몰시켜 어린이 775명 포함 1418명을 죽였다. 전쟁포로를 살해하거나 여성을 강간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민간인은 안중에 없었다
오키나와 현 원호과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의 사망자는 20만656명이다. 미군 1만2520명, 타 지역 일본군 6만5908명, 오키나와 차출 군인 2만8228명이다. 민간인은 이를 모두 더한 수준인 9만4000명이다. 포격·폭격으로 수없이 죽었지만 일본군에게조차 버림받았다. 미군에 정보를 넘길 것을 우려한 일본군이 민간인들을 세뇌하고 선동했다.

미군 상륙 이튿날 벌어진 치비치리 가마(자연동굴) 집단자살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미군의 포로가 되면 여자들은 능욕당하고 남자들은 사지가 찢겨 죽는다는 일본군의 지도를 반복해서 학습한 민간인들이 가족끼리 주민끼리 죽고 죽였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戰陣訓)이 민중에 침투한 결과는 이토록 참혹했다. '오키나와 이야기'의 저자 아라사키 모리테루는 "집단 자살사건은 거의 예외 없이 군대와 주민이 섞여있던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했다. 그는 "여기서 자결은 자발적 의지에 근거한 행위가 아니라 군대의 압도적 힘을 배경으로 유도된 것"이라고 했다.

영화 '핵소 고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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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참혹함은 긴조 시게아키 목사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329명이 사망한 도카시키지마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족을 잃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일본군은 마을 지도자와 청년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다. 촌장이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수류탄이 불발되자 한 아버지는 나무를 꺾어 부인과 아이를 때려죽였다. 몇몇 사람들은 면도칼이나 낫으로 목을 긋거나 밧줄로 목을 졸랐다. 나와 내 형도 어머니의 기모노 끈으로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의 목을 졸랐다. 비통한 나머지 눈물이 쏟아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방치할 수 없었다. 악마나 짐승과 같은 미군의 손에 넘겨져 참혹하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나는 적을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으라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그곳을 나왔다. 그런데 전멸했으리라고 생각한 일본군을 길에서 만나 깊은 실망과 배신감을 느꼈다.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과 정신적 장애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며 지낸다."

중부전선에서 병력의 70%를 잃은 32군 부대는 5월 말 지하사령부 방어를 포기했다. '항복은 수치'라고 배운 그들은 교육받은 대로라면 '만세돌격(자살특공대)'을 하거나 자결해야 했다. 영화에서 우시지마 미츠루 중장이 자결하듯 말이다. 그러나 실제 우시지마 중장은 패잔병들을 모아 남쪽으로 도망갔다. 본토 결전에 대비할 시간을 벌면서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한 강화 교섭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사석(둑에서 버릴 셈 치고 작전상 놓는 돌) 작전을 폈다. 주민들이 피신한 가마에 들어가 전열을 재정비했는데 여성, 어린이, 노인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들은 미군이 편 기마전술(동굴 입구에서 기마 자세로 폭발물을 던지거나 화염방사기로 공격)에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영화 '핵소 고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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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비애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은 약 1만 명이다. 대부분은 일본군의 손에 죽었다. 다큐멘터리 '오키나와전의 증언'에서 강인창씨는 "조선인 군부 열두 명이 배고픔을 못 이겨 벼와 감자를 먹었다가 주민의 신고를 받은 일본군에 총살당했다"고 증언한다. 이 작품은 위안소가 오키나와 제도 전역에 120개 이상 설치됐다는 사실도 고발한다. 일본군 문서 '진중일지'에 따르면 이 곳들은 군의 명령에 따라 설치됐고 요금과 시간도 그들에 의해 정해졌다. 오오타 마사히데는 저서 '추한 일본인'에 "지하사령부에 '조센삐'라고 불리며 차별받던 여성들이 스무 명 이상 있었다"고 기술했다.

다큐멘터리 '도큐먼트 오키나와전'에는 조선인 군부들이 백기를 들고 숲으로 향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모습도 나온다. 그런데 오키나와 전투 종결 5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평화의 주춧돌(平和の礎)'에 이름이 새겨진 한반도 출신자들은 447명(대한민국 365명·북한 8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이들의 영혼은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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