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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판 인생, 반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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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도깨비 설화…6년만에 다시 관객 찾는 '하카나'

저승 도깨비와의 내기에 빠진 노름꾼
소중한 것을 깨닫는 순간 때늦은 후회
원작의 긴장감과 재미 생생하게 전달


연극 '하카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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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홀이냐! 짝이냐!"
공중으로 날아간 주사위가 노름에 빠진 한 남자의 운명을 가르는 순간이다. 불끈 쥔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답을 외치는 이 남자의 이름은 '스즈지로'. 그는 노름의 여신 '사이코히메'의 총애를 받는 노름꾼이자 가족도 없이 유리하는 외톨이, 하릴없이 유흥을 일삼는 천하의 난봉꾼이다. 어둠의 세계에서 빌린 행운의 힘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또 하나의 승부가 찾아들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무대를 에워싼다. 극단 '시월'이 김영록(49)의 연출로 무대에 올린 '하카나(HAKANA)'는 고대 일본의 도깨비 설화에서 이야기를 가져왔다.

음산하고 어둑한 삼도천(불교에서 말하는 저승으로 가는 강). 죽은 영혼을 맞이하는 청귀가 등장하며 막이 오른다. 노름을 하다 맞아죽어 삼도천에 오게 됐다는 망자에게 청귀가 말한다. "끗발이 떨어져 맞아죽은 거라고? 하긴 노름에 미친놈들 치고 제 명에 죽는 놈들이 없지. 상판대기를 보니 그 여자 취향이 아니네. 누구긴? 노름의 여신 말이지"라고 말한다. 이어 호기심이 동한 망자를 비웃듯 여신의 총애를 받은 전설적인 노름꾼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준다.

여느 날처럼 노름판에 낀 스즈지로는 우연히 인간세계를 찾은 적귀(저승의 강을 건너는 뱃사공 도깨비)와 내기를 한다. 하지만 그가 내기에 이긴 대가로 적귀에게 받은 건 돈이 아닌 절세미인 '하나카'. 하나카는 시체를 찢어 맞춘 몸뚱이에 갓난애 영혼을 불어넣은 불완전한 여성이다. 꼬박 100일이 지나야 진짜 인간이 되는 성인 여자의 몸. 스즈지로는 그때까지 절대 하카나를 품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경우 하카나가 물로 변한다는 경고를 듣고 이 거래를 받아들인다.
극중 제3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청귀(저승의 강 입구를 지키는 도깨비)의 독백만이 주인공 스즈지로에게 처할 위험을 예고한다. "인간이란 어리석은 거야. 고작 돌조각에 불과한 주사위에 별별 걸 다 갖다 붙이거든. 홀이 계속 나온다고 다음엔 짝이 나올 거라고 우기질 않나. 거기에 인생이고 긍지고 복수고, 하물며 꿈이니 소원이니, 별별 걸 다 걸지."

연극 '하카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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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지로와 함께하게 된 하카나는 아기가 부모에게 집착하듯 시종일관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외양만 어른일 뿐 갓난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無知)'의 존재. 스즈지로는 그런 하카나를 보며 욕정이 일다가도 이내 몸을 추스르며 그녀를 귀찮아한다. 무엇보다 하카나는 많고 많은 노름 중에 얻은 전리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스즈지로의 사정을 엿본 스님 묘해는 하카나를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고, 이를 거절한 스즈지로는 묘해와의 노름에서 첫 패배를 겪으며 하카나를 맡기게 된다.

이후 하카나는 묘해의 도움으로 나날이 아름답고 지혜롭게 변해간다. 하지만 끗발이 다한 스즈지로는 노름판에서마저 쫓겨나는 거지신세가 된다. 과거에 스즈지로와 내기를 했다가 져서 눈 하나를 빼준 조로마사까지 나타나 그를 도발한다. 묘해를 해쳐 마련한 돈으로 노름판에서 서기 전 스즈지로는 "실은 뿌리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 진저리가 나. 행복하지 않았어. 기다리고 있어라, 하카나. 이걸로 한밑천이 생긴다. 마지막이야"라고 다짐한다. 끝도 모르고 내달리는 스즈지로의 모습에 하카나는 "왜 노름을 해요"라고 묻는다. "난 이렇게 태어났어"라고 잘라 말하는 그에게 하카나는 "스즈지로 아니었으면 전 이 세상을 몰랐겠죠. 꽃, 나무, 새, 벌레, 하늘… 이런 것도 하나도 몰랐을 거예요"라고 되려 감사한다.

스즈지로에겐 인생의 전부였던 노름판. 그런 그에게도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났지만 그는 이를 지킬 수 없다. 조로마사와의 마지막 승부에서 돈을 잃자 그는 하카나를 제물로 내놓고 결국 이 시험에 지고 만다. 인간이 되고 싶은 하카나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 꿈이었다는 고백으로 둘은 하나가 된다. 하카나는 물이 아닌 꽃잎이 되고, 폭발하듯 흩날리는 꽃의 광란 속에서 모든 것이 어둠에 묻히고 사라진다. 스즈지로 역을 맡은 배우 김장동(39)은 지난 2일 개막시연에서 "저는 사람이고 '하카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다분히 소유물로만 생각했던 이 괴물을 사람처럼 느끼는 순간이 온다. 이런 것을 통해 사람이 아닌, 내 주위에 있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고 소개했다.

연극 '하카나'의 한 장면

연극 '하카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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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일본의 대극장 메이지좌에서 첫 선을 보인 연극 '하카나'는 일본작가 요코우치 켄스케의 작품이다. 2011년 국내 초연 당시 번안작가 김문광의 손을 거쳐 원작의 긴장감과 재미를 생생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적귀와 거래를 통해 하카나를 선물로 얻는 점에서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와 그리스신화 '판도라'를, 끝내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 하카나의 숙명에서는 영국의 메리 셜리가 1818년에 출간한 괴기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무대는 원작에 충실하기 위해 일본의 옛 노름판과 술집 풍경 등을 목조세트로 구현했다. 조명과 음향효과에 공을 들인 점도 볼거리다. 섬세한 장식이 돋보이는 배우들의 의상이나 분장이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일본 전통 헤어스타일부터 적귀의 도깨비 방망이, 또 어린 아이 같은 하카나가 순백의 전통의상을 입다가 훗날 화려한 붉은 의상으로 여성미와 성숙미를 한껏 드러내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김영록은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캐릭터가 강하다. 이 작품을 골랐을 때 '스즈지로' 자체가 나였다.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 선배들이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런 식으로 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교육적으로 살거나 형식적인 예의를 갖춰 산다. 여기에 '하카나'라는 인물을 통해 영혼의 삶으로 살아가는 데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저도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계기가 될 것 같아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했다.

2011년 이후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연극 '하카나'는 내달 5일까지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3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스즈지로 역의 김장동을 비롯해 하카나(서혜림), 적귀(진영선), 묘해(김영찬), 싸이코히메(선정화), 조로마사(서동석), 미키마츠(황원), 청귀(김병철) 등이 출연한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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