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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 세월호 아이들과 종철이에게 바쳐야 할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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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극한의 슬픔이란 것이 있다면, 또 그 슬픔에 만약 어떤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러시아 화가 크람스코이의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그림에 있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여인이,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어 보이는 비통한 얼굴로 죽은 아이의 관 옆에 서 있는 이 그림은 인간의 언어론 형언할 수 없는 게 있다는 것, 온 마음을 다한 어떤 위로로도 결코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해 첫 촛불시위가 열린 지난 7일, 참사 1000일을 맞은 세월호 아이들을 위한 진혼제였던 이날 우리가 광화문의 세월호 부모들에게서 본 것도 그런 슬픔, 지상의 말을 무력하게 하는 슬픔이었다. 그 자리에는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친구들이 연단에 올라 살아남은 미안함을 얘기했다. 그리고 그날 광화문에는 세월호 아이들과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나왔던 듯하다.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 자기 자신일 수도 있었을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이들의 눈물. 그 눈물은 왜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혹한의 추위에도 기어코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지를 보여줬다. 왜 사람들이 경건한 예배처럼 촛불을 켜는 마음인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세월호 1000일의 다음 주말인 지난 토요일에 사람들은 또 다른 ‘소년’의 죽음을 떠올리고 애도했다. 87년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 대학 4학년의 나이였지만 ‘소년’이었던 종철이, 그와 같은 학교에서 다녔어도 생전에 만나본 일이 없었지만 내게 어느 어른보다 더한 가르침을 주는 ‘소년 종철이’.
돌이켜 보면 지난 두달여 동안의 촛불 드라마가 기적인 것은 철벽정권에 대한 승리 그 자체보다 그 승리가 지극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에 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승리는 촛불시위를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고, 누구보다 많이 참여한 것이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광장의 아이들’은 폭력을 막아주는 가드레일이었다. 폭력을 덮는 꽃이었다. 폭력의 자제로써 폭력 이상의 힘을 내는 온유한 힘, 절제된 힘의 큰 원천이었다. 현실에 아직 마비되지 않은 아이들의 맑은 마음과 의식이 뿜어내는 분노, 그 정결한 분노의 힘이었다.

되돌아보면 지금의 기적은 무언가 신비로운 섭리가, 역사의 간지와도 같은 신비가 작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것이 누구의 보살핌에 의한 것이었는지를. 광화문 광장 위에는 세월호 아이들이 있었다. 배 안에 물이 차오를 때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준 그 고결한 아이들이 있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들의 어머니인 그 아이들이 있었다. 선배를 보호하려다 숨져 간 ‘소년 종철이’의 순결한 혼이 광장의 하늘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의 선취(先取)된 미래다. 그들로 인해 죽음은 삶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스승이 됐다.

지금 우리가 광장에 나서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우리는 가족들의 비탄을 결코 진정으로 위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최선을 다하려 할 뿐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우리의 한 대답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나라는 과연 살 만한 곳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을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건 세월호 아이들 앞에, 소년 종철이의 혼령 앞에 바치는 최소한의 해원(解寃)의 제물이다. 그럴 때 대한민국은 세월호에서 빠져나오고, 종철이의 남영동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선의 어지러운 정치공학이 펼쳐지려는 염려가 짙어지는 지금, 정치인들의 출발점은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이명재 편집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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