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낱말의습격]운명철학

최종수정 2017.01.12 03:00 기사입력 2017.01.11 10:06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운명(運命)에 관해 논하는 자는 신중하지 못해 보이거나 실없어 보일 때가 있다. 운명에 관한 진단과 사유들은 종종 ‘미아리’과(科)로 내몰린다. 운명철학이란, 대학에서 배울 만한 학문의 격(格)을 인정받지 못했다.

운명은 그 존재부터 의심받는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을 운명론자라고 부른다.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미리 기입되어 있다는 믿음이 운명론이다. 인간은 그 운명이 정해진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삶을 숙연하게도 하지만, 때론 갑갑하게도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인간이 추가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운명이나 운명론을 거부하는 사람은, 인간의 삶은 상당 부분 개척되는 것이며 선택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운명 따위에 구속되지 않으며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운명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런 주장들의 문제점은 어느 것도 확인하거나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운명의 문제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해 책임있게 컨설팅해줄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모호하게 그러나 일상적으로 그 말을 사용할 뿐이다. 꼭 만나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너는 내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천직(天職)이라고 믿는 길을 ‘운명’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중요한 갈림길에 설 때 우린 ‘운명이 걸린’이란 표현을 쓰고, 그런 갈림길에서 비장하게 나설 때 ‘운명을 걸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뭔가 잘 안풀릴 때 ‘운명이 꼬였다’고도 하고, 불운(不運)이나 비운(非運)이란 말을 써서 정상적이지 않은 운명의 운행을 표현하기도 한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은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혹은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쾅쾅쾅쾅 비장한 네 번의 노크소리로 시작한다. 삶이란 어떤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가 있다. 그때 벽인지 문인지 모를 공간에 대고 인간은 저렇듯 두렵고도 격하게 두드린다. 운명은 열릴 수도 있고 영원히 응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두드림과 함께 가슴을 치는 쿵쿵거림이 있다. 운명 앞에서 생은 격정과 설렘을 맛본다. 문이 열렸다는 건 시작일 뿐이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운명의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나올 때, 그때조차도 운명은 완전한 미지(未知)이며 미답(未踏)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은 모이라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일종의 직녀(織女)들이다. 운명을 실로 베를 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운명을 이루는 변수들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또 운명은 세 직녀가 분업으로 담당한다. 왜 하나의 여신이 전체를 맡지 않고 이렇게 나눠서 일을 처리하는 걸까. 운명의 자의적(恣意的)인 측면과 선택적인 측면을 세 단계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운명의 여신들조차도 한 사람의 운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는 없다. 클로토(Cloto)는 운명의 실을 물레로 잣기만 한다. 운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에 닥쳐오는 어떤 일의 시작은 클로토가 만들어준다. 그런데 그것이 운명으로 짜여지려면 라케시스(Lachesis)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운명의 운행을 관장하는 것은 이쪽인 것 같다. 운명의 실을 자르는 것은 아트로포스(Atropos)이다.

운명의 세 여신은 마치 생명을 주고 영위하게 하고 다시 빼앗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맡고 있다. 가장 큰 운명은 생명 전체의 ‘실’을 관리하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에게 닥쳐오는 다양한 운명들 또한 생명 작용처럼 생겨났다가 짜여졌다가 다시 잘려 없어지는 그 선분(線分)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고 그들은 믿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 들어 저런 서양식의 운명관 대신 운명(運命)이라는 한자가 지닌 느낌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세 여신의 미션을 동양식으로 나누면 생명(生命)과 운명(運命)과 운명(殞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을 제외한 가운데의 ‘운명’을 눈여겨 살피는 것이다.

운명의 운(運)은 ‘드라이브’이다. 명(命)은 ‘엔진’이다. 엔진 중에서도 한 오십년에서 백년쯤 쓰는 1회용 엔진이다. 좋은 엔진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능과 수명만큼 쓸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좋다. 목숨이란, 배터리가 들어가 있는 자동차이다. 그 자동차에게 조물주는 배터리만큼만 사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명(命)’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드라이브’의 문제이다. 내 삶을 어떻게 운행할 것인가.

다시 물어본다. 나는 내 삶을 드라이브하는 자유를 부여받았는가. 나의 ‘드라이브 솜씨나 취향이나 습관이나 목적’이 과연 나의 것인가. 그게 전혀 내 것이 아니라면 드라이브하는 자유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그저 대리운전일 뿐이다. 그 운전 중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재량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운명론의 기점이다. 전혀 없다면 누가 운전을 하겠는가. 그런 로봇이라면 세상의 운명들이 그렇게 다채롭게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운전의 재량이 있다는 것, 이것이 인간을 의미있게 만들고 생을 간단하지 않게 만든다. 운명의 길은 누가 선택하는가. 운명의 길에서 핸들을 꺾는 자는 나인가, 아니면 조물주인가. ‘내’가 나의 핸들을 꺾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나’ 속에 이미 습관이나 취향이나 DNA로 들어있는 조물주의 입김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대목이 수상한 것이다. 평생의 대리운전자이면서 자신이 운전을 하고 있다고 믿도록 설계된 ‘운명의 사기극’에 가담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드는가?

그런데 운명과 관련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운명의 가치에 관한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에게는 치명적이고 더없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 존재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를 실감할 수 없다. 특히 생명 체계 전체를 관리하는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장기의 말을 쓰는 것과 비슷한 ‘가치’일 뿐이 아닐까. 살아있어도 상관없지만 소용돌이치는 운명 속에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생명계 내에서 사라져도 또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노자가 말한 천지의 비정(非情)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한다. 마치 군부대의 군수관리 담당처럼 전체 숫자와 품질만 유지되면 상관이 없다. 개체의 비극은 자신의 비극일 뿐이며 조물주의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이, ‘운명’에 관한 심각한 견해 차이이다. 인간이 하늘을 원망하는 소리가 인간 역사 내내 울려퍼졌지만, 개개인의 운명이 모두 적절하게 개선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이다. 운명의 개선은 자신의 작은 재량권을 활용하여 타개할 수 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가 어떤 운명을 걸어갔는지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소수의 인간 뿐이다. 자연이나 조물주는 그런 것을 기억해둘 턱이 없다. 수많은 목숨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생명계에서 한 개체의 삶의 곡절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본인에게만 턱없이 중요하고 치명적인 운명을 드라이빙하며 우리는 가끔 저 무심한 조물주 선생이 도와주기를 기대한다. 설마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이렇게 내팽개치지는 않겠지 하고 인간적인 기대를 걸어본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이 조물주라면 수십억명의 인간의 운명과, 그것의 수십억배에 달하는 온갖 생명체들의 자잘한 운명에 개입하느라 시간을 보내겠는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오늘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