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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읽어내는 기호로서의 바보, <바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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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르네상스 유럽 독자를 사로잡은 베스트셀러 <바보배>는 시공을 초월하고 어느 군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부조리와 어리석음을 다양한 바보에게 투영해 풍자한다. 사진 = 읻다 제공

중세 르네상스 유럽 독자를 사로잡은 베스트셀러 <바보배>는 시공을 초월하고 어느 군상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부조리와 어리석음을 다양한 바보에게 투영해 풍자한다. 사진 = 읻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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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바보배>(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 노성두 옮김, 읻다 펴냄, 556쪽, 20,000원)

문자의 발명이 인류에게 지식의 전승을 가능케 했다면, 그 이전에 통용된 그림과 문자의 조합은 지식 너머 유희의 장을 새롭게 열어젖혔다.
사소하게는 감정적 내용서부터 크게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역사적 내용을 다룬 그림과 문자 조합은 하나의 기록이자 '대중문화'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의 기록인 '사자의 서'는 파피루스에 종교적 서사와 펜화 소묘를 함께 담아 내용의 이해를 도왔고, 13세기 초에 제작된 가장 방대한 중세 필사본인 '코덱스 기가스'는 한 페이지 가득 악마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악마의 성서'라는 별칭을 얻으며 대상에 대한 경계를 끌어올린 생생한 필사 기록물로 남아있다.

이처럼 종교와 기록의 도구로 사용된 '그림책'을 유희의 영역에서 활용하기 위해 중세 유럽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는데, 그중 1494년 출간된 북유럽 르네상스 최초의 베스트셀러 <바보배>는 텍스트가 갖는 교훈과 상징과 함께 비유를 담되 사실적으로 표현된 판화가 더해져 당대 도회의 시민 독자층을 단숨에 사로잡은 하나의 킬러콘텐츠로 급부상했다.

이집트 19왕조 시기에 작성된 '사자의 서'는 그림과 문자를 함께 기록함으로 사후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고 있다. 사진 = Page from the Book of the Dead of Ani, c. 1275 B.C.E., 19th Dynasty, 57.3 x 46.2 cm, Thebes, Egypt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이집트 19왕조 시기에 작성된 '사자의 서'는 그림과 문자를 함께 기록함으로 사후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고 있다. 사진 = Page from the Book of the Dead of Ani, c. 1275 B.C.E., 19th Dynasty, 57.3 x 46.2 cm, Thebes, Egypt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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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학자와 천재 화가의 조우

독일 소시민 계급의 여관집 아들로 태어나 당시 신생학교인 바젤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인문주의의 세례를 받은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고대문학부터 성서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의 해박한 인용과 교훈을 바탕으로 <바보배>를 집필했고, 여기에 종교적 교훈과 신화의 극적 장면을 사실적이고 독창적 화풍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가 더해진 <바보배> 속 서사의 실감은 이내 선풍적 인기로 이어졌다.

천사와 악마, 권선징악의 교훈을 전하던 종전의 그림책 주인공과 달리 모조리 바보들로 채워진 책 <바보배>는 바보로 대변되는 당대의 부정한 인물상 풍자에 대한 공감과 조소, 저자 스스로 바보를 자처하는 자조적 시선, 그리고 우릴 비웃으며 책을 읽는 독자 역시 바보라는 책 속 주인공들의 또렷한 눈동자까지 다층적 시선 속에 현실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력을 담아낸, 시대와 독자의 거울이었다. 이 혁신적 텍스트에 대중은 환호했고 이내 수요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시장에는 <바보배> 원전에 조악한 첨삭을 덧붙인 해적판본이 잇달아 쏟아져 나오며 그 인기를 반증했고, 이에 원작자인 제바스티안 브란트가 재판을 찍을 때 항의문을 덧붙이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풍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해 명성을 얻은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에 착안, 인간을 대표하는 열두명의 바보를 배에 태우고 그 항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남겼다. 사진 = 히에로니무스 보스,「바보들의 배」, 나무판에 유채, 57.8×31.0cm, 1488년 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풍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해 명성을 얻은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에 착안, 인간을 대표하는 열두명의 바보를 배에 태우고 그 항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남겼다. 사진 = 히에로니무스 보스,「바보들의 배」, 나무판에 유채, 57.8×31.0cm, 1488년 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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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넘나든 풍자의 적시성

“글월을 모르는 까막눈, 낫 놓고 기역 자 모르는 사람들은 책에 실린 판화에서 자신의 바보 형상을 보겠네. 또 판화에 실린 바보가 어떤 인간인지, 누굴 닮았는지, 어디가 모자라는지 알게 되겠지. 나는 판화를 ‘바보거울’이라고 부르려고 하네.”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세상의 모든 바보를 모아 배에 태우고는 자신도 올라타 바보들의 천국인 ‘나라고니아’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각색(各色) 바보에 대한 노래는 그 다양함과 적확함, 그리고 신랄한 풍자를 바탕으로 퇴색되지 않고 여전히 반짝이는 해학을 전하는데, 그 적용범위가 얼마나 다양한지 오늘날의 독자가 펼쳐 들어도 읽는 내내 정신이 번쩍 날 정도다.

<바보배>에 삽입된 판화 중 고집불통 바보에 대한 그림. 작가는 그림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날지도 못하면서 제 고집으로 둥지를 뜬 새나, 새 둥지를 차지하려고 나무에 오른 바보는 땅에 곤두박질쳐도 할 말 없겠지" 사진 = 읻다 제공

<바보배>에 삽입된 판화 중 고집불통 바보에 대한 그림. 작가는 그림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날지도 못하면서 제 고집으로 둥지를 뜬 새나, 새 둥지를 차지하려고 나무에 오른 바보는 땅에 곤두박질쳐도 할 말 없겠지" 사진 = 읻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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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에게, 바보가

연일 쏟아지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속 어리석고 악한 이를 향한 분노를 바보배의 노래를 통해 잠시 가라앉혀보는 것은 어떨까. 그 사례로 들자 하면 전문을 다 인용해도 모자랄 터.

먼저 낙오하지 않기 위해,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자녀를 잔혹한 교육현장으로 내모는 학부모를 보면 ‘못된 본보기를 보이는 부모 바보’의 노래를.

“아내는 남편을 닮고,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네. 수도원장이 주사위를 빌려주고, 승려들이 화투짝을 돌리는 짝일세. 몹쓸 가르침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는 범절도 명예도 간곳없네.”

청문회장에서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증인들에게는 ‘진실에 입 다무는 바보’의 노래를.

“진실에는 입 꾹 다물고 지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 영원히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진실이니, 바보가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서 깎아내려도 진실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일은 없겠네.”

5년의 시간을 담보로 권력의 심장부에서 은밀히 국정을 농단해온 비선실세 무리에게는 ‘권력의 종말을 모르는 바보’의 노래를.

“천태만상 바보들이 권력을 믿고 까부네. 권력이란 마르고 닳도록 지속하는 줄 알지만 봄볕에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을 포기해가며 회사 일에 매진하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보다는 임금동결과 복지축소를 제시하는 자본의 횡포에는 ‘고마움을 모르는 바보’의 노래를.

“죽어라 일을 시키고 부리면서 보수라고는 쥐꼬리만큼 주는 사람은. 이득을 취하고 싶다면 돈을 먼저 투자할 궁리를 해야 마땅하지. 그래야 채신머리가 선다네.”

그리고 탄핵정국을 맞고도 자신의 과오보다는 내가 흘린 ‘피눈물’만 기억하는 대통령에게는 ‘고집불통 바보’의 노래를.

“불쌍타, 혼자 넘어지고 도울 손이 없는 사람은! 이단 교설에 넘어가고, 따끔한 꾸지람도 듣는 둥 마는 둥. 제 잘난 재능만 믿고 명성과 총애를 차지할 요량이네. 바보들은 대개 높은 데 올라갔다 추락하네.”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김신(공유)는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도 어린 왕의 질투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나 진실을 알고 있는 백성들의 염원으로 영원한 삶을 얻는다. 분노와 억울한 죽음은 영원으로 치환되지만 이내 모든 죽음을 지켜보고도 살아야 하는 고통으로 되돌아 오고, 도깨비에게 부여된 '광기의 화신' 이미지는 침묵에 수렴된다. 이에 반해 <바보배>의 바보들은 억눌린 광기가 발산되는 캐릭터로 묘사되지만 희극적 으로 그려진 탓에 타자를 향한 분노를 대속하는 대상으로 소구된다. 사진 = tvN 드라마 '도깨비'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김신(공유)는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도 어린 왕의 질투로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나 진실을 알고 있는 백성들의 염원으로 영원한 삶을 얻는다. 분노와 억울한 죽음은 영원으로 치환되지만 이내 모든 죽음을 지켜보고도 살아야 하는 고통으로 되돌아 오고, 도깨비에게 부여된 '광기의 화신' 이미지는 침묵에 수렴된다. 이에 반해 <바보배>의 바보들은 억눌린 광기가 발산되는 캐릭터로 묘사되지만 희극적 으로 그려진 탓에 타자를 향한 분노를 대속하는 대상으로 소구된다. 사진 = tvN 드라마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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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광기, 바보인가 현자인가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분석하는 18세기 광인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이성의 대상을 비췄는데, 셰익스피어가 불러낸 오델로, 리어왕, 그리고 햄릿의 광기의 대척점엔 그 광기를 희극적으로 머금은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이 있었다. 이들을 단순히 우리 현실에 겹쳐보는 일로 부조리를 웃어넘기는 것에 그친다면, 현재의 독자들 역시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르고 바보를 비웃는 바보가 될지 모를 일이다.

적어도 중세의 작가는 바보의 모습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통렬하게 비판하되, 그 대상에 자신도 집어넣는 대담함을 가진 바 있다. 시대를 향한 비난에 동조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며 중요한 것은 자기성찰과 스스로의 목소리이다.


바보는 광기를 조련하고 교육받아 정상인인체하는 사회에서 불현듯 삐져나오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나 아닌 타자에 대한 극단적 경계와 경쟁심으로 일생을 허비하는 이를 비추는 거울이다. <바보배>는 너와 나의 다름을 인지하되 모두를 바보라 노래하고, 실수를 반복하는 바보의 모자람을 풍자하되 비난하지 않는다.

<바보배>는 그 조롱의 노랫말 옆에 바보의 판화가 나란히 실려 있어 한 장 한 장이 거울이 된다. 백 개가 넘는 거울을 담고도 이토록 가벼울 수 있을까. 수많은 거울 속 바보를 통해 나를 보고, 또 세상을 보는 일은 아마 전에 없던 생경한 체험이 될 것이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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