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오후 한詩]11월의 비/박장호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이 비가 내리길 정확하게 11개월을 기다렸다.
훨씬 전에 권총은 녹슬었고 장미는 시들었다.
액슬은 녹슬, 슬래시는 시들, 밴드는 권총과 장미.
나는 전쟁과 평화를 말했고 남들은 남녀의 성기를 말했다.
나는 남북전쟁을 말했고 남들은 시가전을 말했다.
나는 인내를 말했고 남들은 환자를 말했다.
객석으로 술병을 던지던 지구상에서 가장 난폭한 밴드.
나는 정당방위라고 말했고 남들은 폭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미치고 싶었고 남들은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나는 안다. 권총과 장미가 사막을 건넜다는 것을.
희망을 절망적으로, 절망도 절망적으로.
나는 11개월 동안 미친 듯이 정신 차렸다.
흰국화행려술병여관젖은휴지갈라진철길죽은가수끊어진기타짧은손가락말더듬이
내 맞은편에 두었던 모든 것들.
건방지게도 잠시 열망을 품었었노라. 이에 깊이 사과한다.
그래, 11월의 신부와 관 속에 들어가련다.
11개월 동안 죽자고 나는 애드립만 쳤다. 죽자고 나는 기우제만 지냈다.
11개월 동안 한 번도 11월의 비는 내리지 않았다.
(후략)

[오후 한詩]11월의 비/박장호
AD
원본보기 아이콘


■시인이여,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그날이 언제였는지는 이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은 차라리 십일월이어서 우리 이십대가 청춘이 온통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오로지 십일월이어서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 십일월의 비가 내렸지. "미치고 싶었고" "건방지게도 잠시 열망을 품었었"던 우리,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 그때 그 십일월. 지금도 십일월이면 비가 내리지. 내리곤 하지. "훨씬 전에 권총은 녹슬었고 장미는 시들었"지만 십일월이면 십일 개월 동안 한 번도 내리지 않았던 십일월의 비가 내리지. 아무 이유도 없이 내리지. 그냥 내리지. 십일월의 비는 십일월처럼 내리지. 십일월처럼 적막하게, 적막함도 없이 내렸다가 십일월처럼 사라지는 십일월의 비. "차가운 십일월의 빗속에서 촛불을 지키기가 너무도 힘겨워요."(Guns N' Roses, November Rain) 그랬지. 그랬더랬지. 시인이여, 지금도 우리 다만 십일월의 빗속에서 "희망을 절망적으로, 절망도 절망적으로" 그러나 저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을 보듬고 우리 십일월의 비를 맞고 있지. 마지막 절망처럼 마지막 십일월의 비를 "죽자고" 맞고 있지.




채상우 시인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뒷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