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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손기정 옹이 세무사를 찾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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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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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을 찾았다. 답답한 가슴을 풀어줄 시원한 책 한 권 없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서점은 자기계발서와 재테크 가이드, 학생을 위한 참고서로 넘쳤다. 세대를 가릴 것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고단함이 책방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신간 코너를 지나다가 반가운 저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김형석. 오래 전 대한민국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앓았던 ‘고독이라는 병’. 그리고 밤을 지새우며 읽은 ‘영혼과 사랑의 대화’.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한 그 감성적인 수필집의 초판이 나온 게 1960년인데, 그 분이 6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다시 책을 썼다고?

그 때의 ‘김형석’이 맞았다. 우리 나이로 97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육필로 최근에 펴낸 책의 제목은 그와 딱 어울리는 ‘백년을 살아보니’였다. 행복론으로 시작되는 책을 천천히 넘기다가 손이 멈추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라는 항목에 들어있는 ‘손기정 옹이 세무사를 찾은 이유’라는 소제목의 글이었다. 가슴을 쿵하고 때렸다. 책을 덮었다.
김형석 명예교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트 손기정 옹에 대해 쓴 내용은 한 쪽 남짓했다. 세무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들은 얘기로 대강의 내용은 이랬다.

<최 세무사는 조금 전에 손기정 옹이 다녀가셨다고 얘기하면서 그분을 보내드리고 나서 자기 마음이 무거운 반성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다. 손 옹이 찾아와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내가 요사이 어디서 상금을 받은 것이 있는데, 세금을 먼저 내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는데 좀 도와주면 좋겠어"라고 했다. 세무사가 "선생님은 연세도 높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고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지금까지 한 평생 얼마나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살았는데, 세금을 먼저 내야지. 내가 이제 나라에 도움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무사가 세금을 계산해 보여드렸더니 손 옹은 "고것밖에 안 되나? 좀 더 많이 내는 방법으로 바꿀 수는 없나?"하고 요청해 왔다. 세무사가 다시 법적으로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방법으로 계산해 드렸더니 그제야 만족해하면서 "됐어, 그만큼은 내야지,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하면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손기정 옹은 2002년 타계했다. 세무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노령으로 보행이 불편했다고 하니 아마도 20여년은 지난 일이 아닐까 싶다. 손 옹의 일화를 읽으면서 세무사가 그랬듯이 나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나라를 잃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불행한 마라토너. "나는 한 번도 일본을 위해 뛰어본 적이 없다"고 절규한 손기정. 그는 어쩌면 피해자였다. 재산가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나라의 혜택을 말하며 세금을 더 많이 내겠다고 자청했다.

나라가 어려우면 우리는 한탄한다. 왜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자, 큰 어른은 없는가. 미국처럼 세금을 올려달라는 기업인은 없는가.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는 시국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기대고 위안을 받을 인물이 없다는 현실은 국민을 더 깊이 절망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어떻게 숱한 시련과 절망, 집권자의 배반 속에서도 나라는 버티고 발전해 왔을까. 그 답을 손기정 옹의 일화에서 읽는다. 권력자, 목소리 큰 정치인, 절세에 골몰하는 기업주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사람들, 이웃과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대다수, 그들이 나라를 이끌어 온 진정한 리더였다. 그들이 희망의 출발점이다. 지금의 국가적 시련에서도 그렇다.

박명훈 전 주필 pmho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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