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이럴 땐 꼭,이라고만 했어
햇살이 이럴 땐
사막의 나무들은 잎을 말아 이슬을 모으고
시실리의 어린 처녀들은 포도를 밟아 술을 빚을 거라고
붉은 술이 익으면 축제의 밤이 시작되고
저녁이면 꽃잎을 닫는 꽃들도
햇살이 이럴 땐
빈 여름 침실처럼 활짝 열려 있을 거라고
한 남자가 평생을 바라본 풍경과
한 여자가 일생을 바라본 뒷모습이
사랑이 아니었어도
손바닥 위에라도 마음을 내놓을 거야
햇살 속에 더 환한 햇살이 있어야
슬픔이 나를 다 가질 순 없는 거니까
■ 어떤 단어는 이미 그 안에 온기가 있어 입안에 넣고 한참을 굴리다 살짝 발음만 해도 위로가 되곤 하는데, 내겐 '햇살'이 그중 하나다. '햇살'도 그렇고, 아지랑이, 개나리, 봄비, 강아지, 별 그리고 별자리, 모깃불, 목욕물, 베이비파우더, 숭늉, 이불, 온돌, 팥죽도 그런 단어들이고. 아마 사람들마다 이런 단어들이 몇 개씩은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사연이야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너무 슬퍼서" 시인도 "햇살이 이럴 땐 꼭"이라고 버릇처럼 말하곤 했나 보다. 그리고는 저 어느 먼 "사막의 나무들"이 "잎을 말아 이슬을 모으"듯, "시실리의 어린 처녀들"이 정성껏 포도주를 빚듯 그렇게 애절하게 마음을 달래곤 했나 보다. 비록 "사랑이 아니었어도" 지극했던 그 마음을 말이다. 당신에게도 차마 말하기 어려운 간절한 사연이 하나쯤은 꼭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연히 바라보던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마음"을 대신해 당신을 위로해 주던 어떤 따스한 단어나 문장이 또한 있었을 것이고. 오늘은 손바닥 위에 그 단어를 써 보자. 그리고 햇살 좋은 오후에 손바닥을 가만히 펴 보자. "햇살 속에 더 환한 햇살"이 그 안에 정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