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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그 사람들]③선조, 200년만의 전쟁을 만난 비운의 '정치9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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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능인 목릉(穆基)의 모습(사진=두산백과)

선조의 능인 목릉(穆基)의 모습(사진=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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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최근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임금은 단연 선조임금이다. 주로 임진왜란 때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나 공을 세운 장수들과 세자인 광해군을 질투하는 용렬한 모습이 비춰지다보니 선조에게 붙은 별명은 '바보왕', '못난이왕', '찌질이왕' 등 안좋은 것 뿐이다.

그러나 선조는 결코 그런 바보나 찌질한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조 500년 역사상 세종, 정조와 함께 조선 3대 천재군주로 알려져있다. 40년이란 긴 통치기간 동안 그의 휘하에는 율곡 이이, 서애 류성룡, 충무공 이순신 등 뛰어난 문·무신이 넘쳐났으며 이들을 등용한 것은 모두 선조였다. 그만큼 매우 뛰어난 용병술과 정치감각을 보여준 임금이다.
바보왕이란 별명과 달리 어릴 때부터 비범한 인물로 머리가 아주 좋은 인물이었다. 왕이 되기 전엔 덕흥군의 세 번째 아들인 하성군으로 왕궁에서 나와 살고 있었다. 큰 아버지뻘인 명종이 후사가 없어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하나를 왕으로 삼고자 그들을 자주 시험했는데 그때마다 영특한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익선관과 관련된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하루는 명종이 덕흥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며 주었다. 이에 하원군과 하릉군은 아무 생각없이 이를 머리에 썼지만 하성군만 쓰지 않았다. 명종이 왜 쓰지 않느냐고 물어보자 "군왕이 쓰시는 것을 신하가 어찌 쓸수 있겠나이까"라며 사양했다. 이에 명종이 크게 칭찬하며 "네 이 관을 마땅히 너에게 주마"라고 말했으며 훗날 명종이 위독해지자 그를 후계로 삼았다고 알려져있다.

열여섯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은 1년만에 마치고 바로 친정에 돌입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25년간 안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치세는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렸는데 주로 붕당 간의 세력다툼을 적절히 이용하며 타고난 정치수완을 발휘했다. 이원익, 류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이, 이황, 정철, 이덕형, 이산해, 윤두수, 권율, 한석봉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위인들 대부분이 그의 시대에 나타났으며 이들을 등용한 것도 선조의 탁월한 안목 덕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계속 도망만 다니며 무책임한 모습만 보였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건 선조의 잘못 만은 아니었다. 한반도에 10만명 이상의 대병력이 침략한 전면전이 발생한 것은 1359년, 원·명 교체기 홍건적의 침입 시기 이후 230여년만의 일이었다. 200년 이상 이어진 평화로 조선은 본국이 전국적으로 침탈당한 적이 건국이래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국방시스템이 해이해질대로 해이해져있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15만명이나 상륙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도 전쟁 1년 전부터 남부지방에 성벽을 축조하고 유명한 장수들을 임지에 파견하는 등 대비를 했지만 왜군의 규모는 많아야 2~3만을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고려시대부터 명종 때 삼포왜란까지 이어져 온, 단순한 왜구의 침탈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규모가 전혀 다른 국가 대 국가의 전면전이었다. 150년간 치열한 내전을 겪으며 어린아이들까지도 품에 칼을 품고 다니던 일본과 전쟁이 옛날이야기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의 전투능력은 차이가 심했다.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며 북상했고 조선 조정은 장수들의 계속된 전선이탈과 엉망이 된 보고체계로 인해 제대로 된 작전도 짜지 못하고 패배만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신하들과 장수들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계속되는 패전과 도주 속에 명나라로 망명까지 계획하기도 했다. 용맹하게 적진에 뛰어든 세자 광해군과 비교되면서 양위 파동을 일으키는 등 실책을 많이 범하면서 못난 임금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전쟁 1년 전 이순신을 8계급 특진시키면서 모든 신하들의 반대 속에서도 전라좌수사에 앉힌 것은 선조였다. 한양 사수를 주장했던 신하들의 반대에도 피난을 떠나면서 명군의 원병을 얻어내고 결과적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빠른 판단 덕분이었다.

의외로 무기제조나 공예에도 조예가 있었던 모양으로 전쟁 와중에 조총(鳥銃)을 보고 본인이 새로운 총을 설계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장전 속도가 느린 조총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2인 1조로 한 사람은 총신을 붙잡아 조종하고 한 사람은 화약을 계속 장전하는 구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쓰였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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