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취한 말들이 시간을 건너가는 풍경
'베풀다'라는 말은 15세기 문헌(분류두공부시언해, 1481)에도 보인다. 조선초에는 '베프다' '베플다'로 쓰였다. 이 말이 '베'란 말과 '프다/플다/풀다'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베를 푼다'는 말이 하나의 낱말로 굳어진 듯 하다. 이 말을 의역(意譯)하면 보시(布施)가 된다. 보시는 불교 용어로, 자비의 마음으로 널리 베푸는 것을 뜻하는데, 그 한자를 들여다보면 포(布,'베'라는 뜻, 보로 읽는다)를 베푼다(施)는 의미이다.
의식주 중에서 산중 시골의 가난한 자가 제 스스로 하기 어려운 것이 '의(衣)'다. 먹고 자는 것이야 대강 구할 수 있지만, 옷은 베틀이 있어야 짤 수 있고, 만만찮은 수공이 들어가는 일이다.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옷이었다. 가난한 이를 표현할 때, '헐벗고 굶주린'이란 말을 쓰는데, 굶주림보다 앞서 나오는 것이 '헐벗고'인 것을 주목해보라. 옷을 입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보시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베풀다'라는 말은 불교와 친밀해보인다. 이 종교에서 널리 베푸는 일은, 그들의 수행을 아우르는 요점이기도 하다. 베푸는 일을 제하면 무슨 불교가 있겠는가. 중생을 구제하고 이타를 실천하는 것 이외에 무슨 수행이 있겠는가. 자신만을 생각하고 제 가족, 제 핏줄, 제 무리만을 생각하는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아무런 관련이 없는 타인에게도 똑같이 모든 것을 베풀 수 있는 태도를 귀하게 여긴 것이 '보시'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적 개념조차도 세속의 탐욕이 제 편의대로 윤색하여, 남을 돕는 일이 저와 제 가족과 제 죽은 뒤의 공덕을 쌓는 방편인양 호도되었다. 그런 세태에 혀를 차면서도, 그런 욕망인들 어떠랴? 아무런 베품도 없는 삶보다는 백내 낫지 않느냐는 현실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베푼다'는 말이 낯설어져가고 있는 까닭은, 베푸는 행위가 희귀해져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긴급히 베풀어야할 '삶의 궁핍'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물질의 풍요가 모든 궁핍을 다 해결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욱 사무치는 정신적 궁핍을 낳은 점이 있다.
베를 푸는 일은, 원래 마음을 푸는 일이었다. 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베를 아낌없이 풀 수 있고 제것을 기꺼이 내줄 수 있다. 천만금을 쌓아놓아도 풀 마음이 1인치도 없으면 베는 그저 제 탐욕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물건일 뿐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 풀어주는 일이 예전보다 더 절실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뭐가 중한겨?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가 움찔한 것은 저 '보시'가 사라진 마음의 옹졸한 우선순위들에 대해 불심검문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타인이 살아야 나도 산다는 것이 공생이다. 내가 살아야 타인도 산다는 말의 어순만 바꿔도, 비좁아터진 생각이 조금은 넓어지지 않겠는가, 나여.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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