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14편에 다음 문장이 나온다. 공자의 말이다.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貧而無怨 難 富而無驕 易).”
이것은 논어 전편을 통해 일관된 공자의 입장이다. 결코 부(富)를 경시하지도, 빈(貧)을 권하지도 않았다. 물질적 수요의 충족이 정신적 성숙의 토대로 된다는 점과 그 정신적 성숙이 결국 행복의 절대 조건이라는 점을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교(敎)의 목표에 대해서도 논어 1편에서 자장이라는 제자와 문답을 통해 이야기한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이제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진보의 상식(?)을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아직도 그런 측면이 있지만, ‘의식이 진보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는’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은 2차 대전 후 신생 독립한 나라 가운데,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물질적 성취를 이루고, 민주화까지 이룬 나라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썩 좋지 않다. 극심한 양극화와 그것이 세습화되어 신계급사회로 이행하는 불길한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러나 ‘빼앗아서 균등하게 하는 혁명’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런 혁명이 가능한 단계는 이미 지났다. 유일한 길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개혁을 성공시키는 길뿐이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세력이 완고하고, 기득권층이 양보하려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애써 만들어 놓은 밑천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선진국의 문턱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빈이락(貧而樂)은 가난을 즐긴다는 말이 아니다. 그 즐거움(당당함)의 바탕이 물신지배의 차가운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밝은 비전일 수도 있고, 높은 정신적 가치가 만들어내는 긍지일 수도 있다. ‘부이호례 (富而好禮)’의 예(禮)는 양보(讓)하는 마음이 바탕이 된 ‘아름다운 질서’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 있다고 보인다.
공자의 말이다. “예와 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도대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와 양이 조화되지 않으면 예가 무슨 소용인가?(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何)”.
부이호례(富而好禮)를 요즘 말로 하면, '부유한 사람들이 나누고 양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즉 ‘가난하지만 원한에 사무치거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사람들(貧而樂)’이 ‘나누고 양보하는 것을 좋아하는(富而好禮)' 부자들과 손잡을 때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지금 중국에선 부(富)는 자본주의에, 교(敎)는 중국 공산당이 맡는 세기적 실험이 진행 중이다. 그 성패는 인민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중국 공산당이 공자를 들어 올리는 배경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어떨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권력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자발성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당당한 빈자들과 양보하고 싶어 하는 부자들의 ‘아름다운 합동작업’을 고대한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합작(合作)’운동이다.
이남곡(인문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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