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쁨의 '리얼스토리 시간여행' - 옥스포드 법학과 출신이 세상을 놀라게 한 갱뱅 빅쇼
“포르노 영화는 왜 남성 위주인가. 나는 여자에게도 멈추지 않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런데 행위 도중에 한 남자가 손톱으로 그녀의 성기를 심하게 찔러 상처를 냈고 두 시간이나 피가 멈추지 않는 사고가 일어났다. 결국 기록은 251명에서 멈추고 만다. 그 와중에도 애너벨은 마지막 상대와 한 번 하는 서비스를 보였는데 그는 포르노계의 원로 스타인 론 제레미였다. 그는 이 이벤트의 사회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포르노 여전사(女戰士)라고도 불리지만, 이런 문제에 관한 한 내숭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애너벨 청은 낯설고 놀랍다. 그녀는 어떤 여자였을까.
1972년 5월 중국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성장한 그녀(어린 시절 이름은 그레이스 퀙이었다)는 초등학교 선생을 하는 아버지와 어린이 TV프로의 진행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난다. 보수적인 나라와 보수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열세 살 때 순결을 잃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녀는 이미 남들과 다른 성행위를 실험하는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옥스포드대로 유학을 간 애너벨은, 공부가 재미없었기에 정신적인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벌어진다. 런던의 지하철역 구석진 곳에서 사내 6명이 달려들어 윤간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일로 그녀는 몇 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영국 생활이 끔찍했다. 애너벨은 보따리를 싸서 미국으로 향한다.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사진학과 미학 공부를 한다. 또 여성학 강의도 즐겨 들었는데, 당시 그녀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탐독하는 학구적인 면모를 보였다. 수업시간에 그녀는 도발적인 질문을 많이 해서 교수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때의 공부는 그녀에게 여성 주체성에 관한 신념을 갖게 했고, 여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야겠다는 의욕을 심었다.
1994년 자신의 생각을 실천할 기회가 찾아온다. ‘모어 더티 데뷔턴트(More Dirty Debutantes)'라는 포르노 영화에 출연키로 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감정 없이 섹스만 해도 상관 없어요. 사람들은 나를 매춘부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나는 내 몸을 즐길 뿐이예요.”
이 해에 ’팀 전원과 했다니 믿을 수 없어!(I Can't Believe I Did The Whole Team!)'라는 갱뱅 영화에 출연해 실력을 과시한다. 두 사람의 남자와 동시에 벌이는 ‘양동(兩動) 섹스’ 이후에 그녀는 큰 자신감을 얻어 세기의 ‘갱뱅 마라톤 잔치’를 치른다. 갱뱅 슈퍼쇼 이후 대상 남성 상당수가 에이즈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녀는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이벤트를 소재로 한 영화 <애너벨 청 이야기>에는 그녀가 에이즈 검사를 받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평소의 당차고 겁없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두려움과 슬픔에 가득 찬 약한 애너벨이 거기 서 있다.
한편 5년 뒤인 200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들여온 영화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흥행은 참패였다. 모대학에서 그녀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려고 했는데 여론이 나빠지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그녀가 갱뱅을 한 진짜 이유는 뭘까. ‘여성의 욕망’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실천적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인기와 돈이라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왕 포르노를 할 것이면 주목을 받아 ‘스타’가 되고싶은 욕망을 지니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같은 동양계 스타인 키아는 이렇게 흥분한다.
“포르노산업 현장에서 자신의 성적 상품가치를 올리려는 경쟁 속에서 애너벨 청은 큰 피해를 준 거예요. 그녀가 그 이벤트 대가로 1만 달러를 받았다고요? 그러면 1인당 얼마예요? 50달러도 안되는 헐값으로 한 게 되잖아요?”
사실 애너벨이 말하고자 했던 ‘여성의 능동적 욕망’은 매우 의미있는 발언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251명의 남자를 물레방아 넘기듯 받아넘기며 섹스쇼를 벌인 것이 ‘능동적 욕망’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또다른 기계적인 노동으로 성행위의 의미를 폄하한 것일 수도 있다.
애너벨의 발언은, 차라리 이 땅에 있는 여전사들에게서 사례를 찾는 게 어떨까. 서라벌 밝은 달빛 비치는 늦은 밤에 풍차돌리기를 즐긴 신라의 처용부인이나, 섹스 상대에게 문신을 새겨주는 방식으로 여러 남자를 꿰어 돌리는 조선의 어우동여사가 더 여성의 원초적 욕망에 충실했던 것처럼 보인다. 갱뱅은, 섹스마저도 기록 갱신의 생쇼로 만들어내는 나라의 ‘떠벌이’ 풍경이다. 애너벨은 2000년 은퇴해 웹디자이너로 활동해왔다.
이기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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