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통계의 요지는 이렇다. 한국에서 네 집 가운데 한 집(27%)은 비상시를 대비한 현금을 갖고 있으며 그 비상금의 평균 규모가 69만3000원이란 것이다. 현금은 5만원권이 55만9000원으로 가장 많았다. 조세재정연구원 조사는 국민 10명 중 넷은 세무조사에 걸리지 않는다면 탈세를 할 의향이 있으며, 절반에 가까운 국민은 세무당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사결과를 보는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언제부터 중앙은행과 국책연구기관이 국민의 지갑과 의식 속까지 샅샅이 조사했는가. 두 기관이 따로 따로 발표한 조사결과를 나란히 놓고 보면 아주 불쾌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 국민들은 걸리지만 않는다면 탈세할 의향이 있고, 집에 5만권을 쌓아놓고 사는 것은 그 증거라는 것이다. 물론 두 기관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이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사에는 문제가 있다.
집에 5만원권을 쌓아놓고 쓸 만한 사람은 한정돼 있다. 고액 자산가들이 집중해 있고, 금고가 많이 팔린 지역의 가구주를 대상으로 조사했다면 좀 더 현실에 가까운 비상금과 5만원권 보유규모가 나왔을 것이며 더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평균값은 비상금이 별로 없는 사람의 비상금 액수를 높이고 많이 가진 사람의 액수는 낮추는 함정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16일 펴낸 '아시아불평등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하는 나라다. 누가 5만원권을 갖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하다.
발행 족족 사라진 5만원권에 대해 '국민 대다수가 비상금으로 갖고 있더라'는 식의 설문결과는 실소를 낳기에 충분하다. 5만원권을 많이 보유한 사람은 현금거래를 많이 하는 고소득 자영업자들이며, 그들이 탈세도 많이 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데 그것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로 판명됐기에 더욱 그렇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이 국세청에서 받아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변호사ㆍ회계사ㆍ의사 등이 현금영수증 발급을 하지 않았다가 적발돼 낸 과태료는 11억5100만원이었다. 이는 같은 이유로 부과된 전체 과태료 80억1200만원의 14.3%다. 현금영수증 발급이 의무화된 지 6년이 지났지만 변호사와 의사 등은 여전히 영수증 발급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설문조사라면 이들을 대상으로 성실납세 의식을 묻고 전문가들에게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을 묻는 것이어야 했다.
정작 해야 할 일을 않으니 지하경제 양성화는 점점 멀어진다는 질책을 받는 것이다.
박희준 논설위원 jacklon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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